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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고 싶은 나의 교수님

2013년도_우수_[미디어학과]_이주엽교수

  • 이종원
  • 2014-02-10
  • 16248

미디어학과_김예슬

 

    스물한 살, 나는 꿈을 포기한 채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십여 년 동안 꿈꿨던 선생님을 접어두고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입학한 아주대학교 미디어학과는 수험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과였으며 심지어 문과에서 이과로 교차지원까지 하게 되었다. 일 년간의 재수 생활 끝에 드디어 원하던 대학생이 되었지만 대학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마냥 즐겁진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꿈을 포기하고 내가 원하지 않았던 과에 들어와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1학년 1학기엔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기초 과목들이 있었다. 수학이나 생물은 이미 다들 고등학교 때의 기초가 있기 때문에 동기들은 대부분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첫 수업 시간 때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 하는멍청한 기분의 충격 때문에 매일매일 필사적으로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기초 과목보다 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은 전공 필수 과목이었던 디지털 미디어디자인 기초였다. 기초 과목들은 정규 수업 외 튜터링을 따로 운영했기 때문에 튜터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전공 필수 과목들은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해내야만 했다.

    특히 내가 가장 자신 없던 과목은 디자인 기초였다. 난 어릴 때부터 미술엔 도통 재능이 없었으며 내 자신이 미적 센스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붓보다는 펜이 좋았고, 한 장의 그림보다는 한 줄의 글이 더 좋았다. 고등학교 이후로 절대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미술을 대학교에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확히는 미술이라기보다 디자인이지만 나는 내 자신의 예술적 감각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자인 기초 과목이 가장 두려웠다. 당연히 매 주 새로 나오는 과제 주제를 접할 때마다 절망적이었다. ‘원으로 공간감 표현하기’, ‘선으로 운동감 표현하기등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과제들은 날 무겁게 짓눌렀다. 이렇게 힘들었던 기억만 있는 디자인 기초 과목이었지만 이 과목을 담당하셨던 이주엽 교수님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교수님으로 남을 것 같다.

    이주엽 교수님은 내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교수님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시는 분이셨다. 무엇보다 나는 학창 시절 학교 선생님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만큼 교수님들의 일반적인 강의 형식과는 다른 이주엽 교수님만의 학생들과 소통하는 수업 방식이 흥미로웠다. 교수님은 디자인을 가르치고 싶으신 게 아니라 나누고 싶으신 것 같았다. ‘AB라고 정의를 내리며 우리에게 전달하는 게 아니고 일단 먼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디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디자인과 예술이 다른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등 질문을 제시하면 학생들이 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학생들이 대답을 하면 교수님은 꼭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방금 말했던 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 꼭 이어지는 질문들을 하셨다. 디자인 기초 수업은 항상 마침표보단 물음표가 많았던 수업이었다.

    1학기 초반에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학생들과 피드백을 하는 수업을 하고 싶은데 한국 대학생들은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시면 모두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대답을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저 멀뚱멀뚱 있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이런 태도를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장장 10년이 넘는 기간을 선생님의 일방적인 강의만 들으면서 살아온 학생들이 대학교에 들어왔다고 한순간에 바뀌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고 말이다. 교수님은 대학생이 되고, 20대가 되고, 미성년자를 벗어난 학생들이 이전과는 다른 열린 태도와 적극적으로 교수님과 소통하는 노력을 원하신 것 같았다.

    나는 워낙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기에 선생님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 나중에 내가 선생님이 되면 이 분의 교수법을 참고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수업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주엽 교수님의 수업은 내가 들었던 수업 중 유일하게 학생들과 소통하는 수업이었으며, 내가 나중에 만약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다면 꼭 이런 수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교수님은 이미 디자인 분야에 대해 엄청난 공부를 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학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배운다는 느낌이 항상 들 정도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시며 생각을 나누셨고 그 점을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이주엽 교수님을 잊지 못하는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아마 1학기가 절반쯤 지나던 때였던 것 같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학과 공부가 다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셨다. 그 당시 단지 학과 공부에만 매달리던 나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신입생의 기분을 만끽하며 즐겁게 다니는 동기들과는 달리 난 그저 묵묵히 3월부터 도서관을 다니고 학교와 집만 오갔다. 힘들게 재수까지 하고 대학생이 되었는데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싶냐고 의아해하는 동기들의 말을 들었고, 혼자 속상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당시 나는 꼭 학점을 잘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과 공부에 충실했다. 게다가 항상 꿈이 있고 목표가 있던 내가 갑자기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싫어서 온 신경을 학과 공부에 쏟았다.

    그렇게 혼자 속앓이를 하던 중 교수님의 그런 말을 들으니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교수님은 강의실에서 듣는 수업만이 배움이 아니고 동아리를 들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다 배움이고 경험이라고, 학점에만 연연하는 대학생이 되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대학 시절, F를 받을 뻔했던 교수님의 경험을 인용하시면서 비록 F를 받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내 옆엔 나와 절친한 친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학과 공부엔 조금 소홀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영상 분야의 소학회에 가입해 수업을 듣기도 하고, 밤샘 영화 촬영을 하기도 하고, 관심이 있었던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 밤새도록 연극 연습을 하고 오기도 하는 친구였다. 나는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 열정을 쏟는 그 친구가 항상 내심 부러웠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교수님의 조언을 듣는 나와 달리 교수님의 말에 공감을 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들었던 교수님의 조언과 조언을 들으며 느꼈던 씁쓸함은 후일 나의 선택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여름방학마저 영어 공부를 하면서 매일 학교에 나왔던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여유가 생기게 되자 포기했던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간의 고민 끝에 교직 이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주대학교에 교직 이수가 가능한 과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교직 이수를 포기한 나는 어릴 때부터 대학생이 되면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교육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취약계층 청소년에게 멘토가 되어 주는 멘토링 활동과 고등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교육 봉사,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둘 다 하고 싶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봉사 두 가지는 좀 힘들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가장 시간이 많은 1학년에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내가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흥미는 있지만 나에게 적성이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다시 고민을 시작했던 나는 결국 두 봉사활동을 전부 신청했고 선발이 되었다. 학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체력이 될까 등 걱정은 많았지만 그 걱정을 전부 덮고 내 결심대로 행동하게 된 용기의 원인은 1학기 디자인 기초 수업 때 들었던 이주엽 교수님의 조언과 불편한 마음으로 조언을 들었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소 무리한 2학기를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일단 학점은 직전 학기보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떨어진 학점 대신에 열악한 교육 환경에 있는 중학생 아이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함께 봉사하던 스무 명의 대학생들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전부 각자 다른 학교에 다른 전공, 다른 나이인 대학생들과 매주 만나면서 관계에 대해 많은 배움을 얻게 되었다. 또 고등학생 시절, 수학을 포기했던 내가 극적으로 수학 점수를 올렸던 경험을 인터넷에 올리게 되어 많은 후배들을 상담해주고 신문사와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수학 때문에 울면서 공부하던 내가 지금은 직접 칠판 앞에 서서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늘 뿌듯했으며 나에게 배움을 감사하는 학생들에게 고마웠다. 무엇보다 나는 교육 봉사를 통해 선생님을 업으로 삼기보다는 사회인이 되어 다른 직종에 종사하더라도 이렇게 틈틈이 교육 봉사를 하며 살고 싶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꿈을 포기해서 방황하고 선생님이라는 꿈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나 자신을 놓아주게 되었다.

    내가 2학기에 용기를 내어 시작했던 활동들은 학교 강의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과는 또 다른 배움이었다. 만약 다시 디자인 기초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이 해주셨던 조언들을 듣는다면 지금의 나는 학과 공부 외에 다른 배움이라고? 사람들 만나는 건 그저 노는 게 전부 아닌가?’ 라는 어리둥절한 의문을 가지는 게 아니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 대학생 김예슬에서 시야가 넓어지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생각이 바뀌게 된 전환점을 통과한 대학생 김예슬을 만들어 준 조언을 해 주셨던 이주엽 교수님. 그 교수님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