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학교

검색 열기
통합검색
모바일 메뉴 열기
 
 
 

다시듣고 싶은 명강의

2015년도_입선_[살아있는 미술관]_이동재교수

  • 유남경
  • 2016-01-27
  • 12886

기계공학과 김동오

 

가시지 않은 여름. 한 줄기 땀방울이 채 식기 전 수업은 시작되었다. “시험으로 평가받길 원하는 사람은 내 수업을 듣지 마라.”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없으며 오로지 수업을 듣고 느낀 점을 적는 강의노트로 학점을 평가를 하겠다.” 교수님의 센세이션한 말씀 한마디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알 수 없는 미술가들과 그림들. 교수님이 질문을 던진다. 몇몇은 적극적으로, 몇몇은 소극적으로, 몇몇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짧은 토론들이 오고가고 결국 미술에는 정답이 없다는 간략한 설명과 함께 수업이 계속 진행된다. 수업 중간 중간에도 고대 벽화, 뱅크시, 마네, 뒤샹 등 고대미술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토론이 이어지고 옳고 그름을 떠나 정답이 없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수업에 정제되지 않은 소금결정처럼 자신만의 아름다운 해석들을 쏟아낸다. 이렇게 자유로운 토론으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시험이 없는 수업이지만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시험에 해방된 학생들은 수업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고 다른 학생들과 다양한 의견을 자유로이 나눌 수 있었다. ‘이동재 교수님이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수업 중 항상 이동재 교수님은 미술에 정답은 없다라는 말씀을 항상 하셨고 정답이라는 좁은 틀 안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의견을 원하셨다고 생각한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정답을 만들어 닫힌 사고를 유도하는 것 보다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옳고 그름을 떠나 생각의 자유를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수업방식이 굉장히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창의적이길 원하지만 정답만을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창의성 조금씩 사라져 간다. ‘이동재 교수님은 이러한 진부한 수업방식에 대한 파격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출석체크도 학생들의 자율에 맡겼다. ”수업을 듣기 싫은 사람은 오지마라. 나는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매 시간 학생들이 빼곡하게 앉은 책상들을 볼 수 있었고 매 시간 집중을 놓지 않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이 빽빽하게 필기한 깜지같은 강의노트 또한 볼 수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수업방식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였지만 이내 적응하였고 수업이 끝날 때는 땀을 뻘뻘 흘리시며 수업하신 교수님을 보며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싶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중 수업시간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 하였고 가장 기억에 남는 에두아르 마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19세기 누드화의 실제 모델들은 매춘여성 출신이 대다수 였지만 마네의 그림 속 주인공은 언제나 신화, 역사상의 여인들로 표현 되었다. 당시 파리 시대상을 보면 상류층 남성을 상대하는 매춘이 급속히 늘었고 매춘부와 상류층 사이의 만남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올랭피아는 이런 상류층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매춘부중 하나였다.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올랭피아의 고객의 선물일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이 세상의 눈을 피해 보낸 것이기도 했다. 빤히 쳐다보는 올랭피아의 시선을 통해 그들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파리 시의 단속을 피해 은밀한 만남을 유지해오던 남성들. 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그들을 조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19세기에 올랭피아가 그토록 비난받았던 숨겨진 이유였다. 마네는 신화나 역사의 환영 속에 머물러 있는 대신 파리의 현실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다. 그러나 그림 속에 현실을 반영하려 했던 그에게 돌아왔던 것은 끝없는 야유와 비난의 화살이었다. 마네는 올랭피아를 가장 아꼈지만 그의 사후에도 올랭피아는 외면 받았다. 1907년 가까스로 올랭피아는 마네의 친구이자 당시 총리였던 끌레망스의 도움으로 루브르에 전시되었다. 그 후 마네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후대 작가들은 마네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곤 했다. 마네는 살롱의 심사위원들 혹은 관객의 요구만을 쫒는 화가가 아니었다. 전통만을 고집했던 19세기 화가들에 맞서고 시대에 맞서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내었던 에두아르 마네. 새로움을 추구하며 누구도 그려내지 않았던 것을 화폭에 담아냈던 마네. 마네처럼 누군가의 잘못 된 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 비판의 대상이 특권계층 일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는 당대에는 환영받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용기는 현대미술의 초석이 되었고 후대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또한, 현대에 마네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곤 한다.

 

이동재 교수님은 앞서 언급하였지만 수업 중 마네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 하였다. 유독 마네에 집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미술적 가치가 높아서였을까? 아니면 유명한 미술가 였기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수님 아니 인생의 선배로써 앞으로 살아가며 부딪히게 될 문제들에 용감하게 헤쳐 나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제자들이 살아가며 크고 작은 문제들에 봉착하였을 때 좌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마네처럼 시대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묵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그 노력의 결과물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두 번째 메시지를 던졌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동재 교수님의 수업에 모든 내용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깊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뼈가되고 살이 되는 인생학개론 같은 유익한 수업이었다. 수업이 종강한 후 나는 좋은 성적을 받았고 교수님으로부터 한통의 메세지도 받았다. 메세지의 내용을 이 글을 통해 공개할 수는 없지만 내가 작성한 강의 노트에 대한 피드백 이었으며, 교수님이 본 나의 모습이 적혀 있었다. 이 메시지는 앞으로 나의 삶의 방향성을 알려주는 좋은 나침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의명은 살아있는 미술관 이었지만, 나는 이 강의명이 인생학 개론이 되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큰 틀에서 미술에 대해 배우고, 미술관에 대하여 배우지만 미술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갈 방향을 제시 하였고 아직 어린 제자들에게 용기와 꿈을 주었다. 이번 2015-2학기를 마지막으로 이동재 교수님의 수업은 모두 끝이 났지만 아직도 종합관을 지날 때면 이동재 교수님과 함께했던 그 수업들을 회상하며 언젠가 다시 강의실에 앉아 그의 강의를 다시 들을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