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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칼럼] 호랑이의 눈

NEW [칼럼] 호랑이의 눈

  • 정우준
  • 2014-08-25
  • 22227
TV는 제주의 밤을 여과 없이 실어 날랐다. 관음이 관음을, 부적절함이 부적절함을 부르는 속도는 빛과 겨룰 만했다. 중년남자의 얄궂은 행위는 일벌백계의 이름으로 낱낱이 중계되었다. 연락이 닿은 심리학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느라 분주했다.

음란으로 심란했던 한 주였다. 뉴스에 ‘음란’이란 단어가 이처럼 자주 등장한 시기가 있었을까. 곤경에 처한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함께 공부했던 친구였다. 여기서 나는 친구의 역할에 주목한다. 친구는 그날 진실과 우정 사이, 그리고 의리와 도리 사이에서 번민했을 것이다. 상상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엄청난 고백을 들은 친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아니었으리라. 1.내 그럴 줄 알았어. 2.너 그럴 줄 몰랐다. 만약 예측할 수 있었다면 미리 주의(mind)를 환기(remind)시켜주는 게 친구의 도리다. 허물을 덮어주는 게 아니라 허물을 고치는 곳(시간)까지 동행하는 게 좋은 친구니까. 만약에 꿈에도 그럴 줄 몰랐고 무방비상태에서 사건을 접했다면? 그때는 약간의 침묵이 필요할 듯하다. 야단치고 비난하면서 ‘이젠 너와 나는 친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건 무정을 넘어 비정한 짓이다.

법률가인 친구는 그에게 어떤 조언을 했을까. “네가 오늘 친구를 필요로 했듯이 지금은 진실이 필요한 시간이다. 처절하게 뉘우치고 응분의 죗값을 지불하자.” 아마도 그는 지독하게 고독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유달리 많았을 것이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때로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판단력에 흠이 생겼다. 욕망의 급발진. 위안을 실행하기엔 때와 장소가 부적절했다. 당사자는 법원 대신 병원으로 가겠다고 다짐한 상태다. 랭보의 시구처럼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역시 랭보의 시 제목)이 지나면 그에게도 새봄이 올 것이다.

첫 직장인 중학교에서 나는 국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9월에 제자들을 만나면 주제어를 신독(愼獨)으로 택하고 싶다.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간다는 뜻인데 출전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다. 심화학습을 위해 정약용 선생을 모셔오자. “야밤에 산속을 홀로 가는 자 기약 없이 저절로 무서워하는 것은 산속에 호랑이가 있음을 앎이다(夜行山林者 不期懼而自懼 知有其虎豹也).” 선생께서 신독(愼獨)을 해설한 부분이다. 호랑이 눈(CCTV)을 각자 마음에 심어 두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중앙일보 201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