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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칼럼]평등하지 않은 친밀감

NEW [칼럼]평등하지 않은 친밀감

  • 배안나
  • 2010-11-29
  • 28170


-곳곳에 스며있는 온정주의적 불평등…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진정한 선진국

책상머리 앞에 붙여 놓은 빛바랜 메모지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평등하지 못한 친밀감의 문제>라고 적혀있다. 날짜를 보니 지난 추석 연휴기간에 집에서 DVD로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 감상후기다. 몇 년 가야 영화관 한 번 갈까 말까한 내가 어쩌다 끝까지 졸지 않고 본 긴 영화 한 편에 사회과학도로서 문제의식이 발동한 모양이다.

영화의 바탕인 마가렛 미첼의 원작 소설은 역사성이나 서사의 거대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개성 등 모든 면에 있어 가히 미국판 <토지>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못지않게 내 관심을 끈 장면들은 남북전쟁 전 흑인 노예와 남부귀족 백인 농장주들 간의 관계였다. 물론 노예제의 비참함과 불평등이야 거론해 무엇하랴마는 그래도 양자 간의 관계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지만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그런 흑백논리를 뛰어 넘어 생각보다 친밀하고 인간적이었다. 소설의 배경인 남북전쟁 발발 후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정확히 100년이 지난 1960년에도 미국의 흑백차별이 같은 식당에서 밥을 못 먹고, 같은 버스를 타지 못하는 지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영화의 장면들은 사뭇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1860년과 1960년 미국의 흑백문제를
비교하다가 문득 <동물농장>, <1984> 등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문제의식을 떠올렸다. 그것이 경제, 사회적 지위든 혹은 인종에 따른 피부색이든 개인적으로는 친밀하고 훈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만 함부로 넘기 힘든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을 오웰은 "평등하지 않은 친밀감"(intimacy without equity)이라 하였다. 한 때 제국의 경찰로서 그가 피식민 버마인들에 대하여 느꼈던 감정, 선량하고 지적인 남부 농장주와 흑인 노예의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모순적 관계는 기실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도 쉽게 목도된다. 특히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계층 간 격차가 확대일로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情)의 문화"가 지배적인 우리네 경우 오웰의 문제의식은 사뭇 의미하는 바 크다.

사원은 가족이니 노조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가부장적
노사문화, 식모를 친 딸 같이 키워 시집보낸다며 월급대신 적금을 들라 강요하였던 내 어머니 세대의 정서, 서민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며 같이 서민의 아픔을 공유하는 대통령, 캠퍼스를 청소해 주시는 우리 대학 청소 아주머니에 대한 나의 공손함과 이런 저런 소소한 배려, "아시아 인 러브"에 출연한 동남아 외국인 며느리들에 대한 출연진의 태도, 금메달 따서 병역문제 해결하라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배려의 구타"도 서슴지않는 아시안 게임 볼링 감독 등등. 나는 내 자신을 비롯하여 가끔씩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언급된 이들의 진정성을 구태여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음 편치 못하다. 비록 강도와 횟수가 현저히 약하여 비판적 지성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쉽게 연결되지는 못하여도 말이다.

누군가 당연히 날카로운 질문을 들이댈 것이다. 그렇다면 친밀감 없는 평등함이 나으냐고 말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가난하게 평등하면서도 모든 인민이 동무가 되는 기
계적 인간관이 팽배하였던 구 사회주의체제를 누가 선호하겠는가?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유럽에서 장애 노인들이 혐오하는 대상 중의 하나가 관료주의에 찌든 불친절한 복지사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너무 배부른 먼 나라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새겨야할 교훈이 많다. 배 허리 치수가 불어나는 풍요 속에서 온정주의가 "법으로" 혹은 "돈으로"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일의 많은 이치가 그렇듯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해결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의 온정주의 문화와 사회적 진보를 한국적으로 버무려내는 방식을 찾는 것이 연구자인 내가 그나마 "오웰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경인일보- 201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