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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화학분야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 노벨화학상

NEW 화학분야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 노벨화학상

  • 박성숙
  • 2008-07-16
  • 45705

 시 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후(Postdoc)과정을 위해 머물었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노벨상이 주어지는 10월이 오면 학교가 술렁대기 시작한다. 200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3인중 한 명인 로보트그럽스 교수를 포함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가 31명에 이르니, 해마다 이 대학 교수 중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는 큰 관심거리다.   내가 일했던 연구실의 보스이었으며 199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였던 마커스 교수의 경우에도 ‘올해는 주어질 텐데, 안 주어지면 내년에는 주어지겠지’ 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방인이었던 나조차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머무르는 동안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기 때만 되면 덩달아 흥분되면서 묘한 기분에 싸였었다.

     노 벨화학상의 시작은 화학의 정통 분야인 유기화학이 아니고 물리화학 분야에 주어졌다. 즉 노벨화학상은 물리화학이라는 신학문의 태동과 때를 같이 했고, 그 이후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면면이 바로 화학분야의 발전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구조, 천재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는 화학자들

     화학자들은 비이커에 시약들을 섞고 끓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개개의 분자를 쪼개어 이리저리 붙여 새로운 분자를 만드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구조를 여 러 천재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광학의 발전은 분자하나를 직접 관찰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분광학분야의 불후의 명저들을 남기고 그로인해 노벨상을 받은 헤르츠버그 외 분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또 다른 과학자로 멀리켄이 있다. 그는 분광학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분자궤도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혹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노벨상을 탔다고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하며 그의 업적을 비하하기도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초창기 분자분광학이라는 분야 발전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고 그런 토대 위에서 분자궤도 개념은 탄생을 했던 것이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시카고 대학은 분자궤도함수론의 메카가 되어 수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꿈을 안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발전한 양자역학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분자의 성질을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고 멀리켄의 반정량적인 아이디어는 한편으로는 분자 반응에 적용이 되어 후쿠이와 호프만의 노벨상 수상을 가져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화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을 하게 되어 콘과 파플의 수상을 가져왔다. 분광학은 더욱 발전하여 199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즈웨일 등에 의해 발전된 펨토초 분광학은 분자 내에서 실시간으로 에너지, 전자, 원자들의 운동을 볼 수 있게 하고,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뷔트리크 등에 의해 거대분자들의 분자량과 구조들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노벨화학상은 물리가 화학에 끼친 영향과 그로 인한 화학의 거대한 발전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놀라운 통찰력과 겸손함 그리고 조국을 잊지 않은 유안 리

    노 벨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중 1986년 분자살 충돌실험으로 수상자가 된 유안 리를 통해 인류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위대한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느낀 바 있다. 대만 토박이였던 유안 리는 버클리 대학에서 대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에서는 나 한 사람 더 있고 없고가 큰 차이가 없으나 대만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의 연구생활이 희생되더라도 대만으로 가겠다”고 자신의 대만행을 설명했다. 그로 인해 지금은 분자충돌실험 분야에 있어 대만이 메카가 되어, 전 세계에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필히 한 번 가야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타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의 겸손함과 애국심(?)은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지도교수였던 파노 교수는 유안 리를 너무 좋아해, 때때로 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인이 시카고는 너무 추워 대만으로 가자고 졸라 절충으로 버클리 대학으로 옮긴 일,  ‘실험분야에서의 모차르트’로 불리던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어떤 실험도 설계를 할 수 있다, 그런 그도 헬륨 간 충돌에서 양자 간섭현상을 볼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없냐고 하니 현재론 불가능하다고 한 일, 그의 학생들의 학위논문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도교수인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경의감을 감출 수 없었다, 등등. 」


평생을 받쳐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연구해야 한다던 폴링

        노 벨상을 받은 화학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히는 폴링의 일화도 과학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화학분야에 기여한 업적은 그가 서거한 해, 미국화학회에서는  평상시 폴링이 주장하던 ‘일생을 바쳐 연구할만한 성배(holy grail)’에 해당하는 화학연구들에 대해 1년간 ‘Accounts of Chemical Research’에 연재한 것만으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폴링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깊은 산속에서 가로, 세로, 높이가 30 cm인 금덩이를 발견했을 때 당신 같으면 그 금덩이를 버리고 가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길 좋아했다. 문제는 금덩이의 무게가 무려 700 kg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아마 여러분 같으면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가지고 가려고 할 것이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연구는 평생을 받쳐 하기엔 불가능할지 모르더라도 대학원생들은 이런 연구를 해야 한다.” 대학원생들은 큰 꿈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학생들을 감동시켜 훌륭한 화학자를 배출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업적만큼이나 따뜻했던 마커스와 파노

        앞 에서 적은 199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며 한 때 나의 보스였던 마커스 교수에  대한 추억은 위대한 과학자의 체취로 나에게 소중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한 세기에 한 명 정도 나올 최고의 이론화학자인 마커스 교수는 이론과 실험의 큰 괴리감을 갈파하곤 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화학자들은 실험값과 크기를 비슷하게 계산할 수만 있으면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 말은 이론 화학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는 마커스 교수이기에 할 수 있는 그 다운 말로, 이를 떠올릴 때면 그와 나와의 크나큰 차이를 느끼며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던 마커스 교수는 마음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간혹 자신도 모르게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받은 학생은 그의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 았고, 그의 부인은 마커스 교수를 대신하여 학생을 위로해주는 뒤치다꺼리 했다. 

        나 의 지도교수인 파노 교수도 Fano effect, Beutler-Fano profile, Fano-Lichten diagram, Lu-Fano plot, Fano factor 등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정리가 매우 많은 훌륭한 과학자였다. 한국에 귀국하여 파노 교수에게 편지를 쓰니 반갑게 답장하면서, 일본인 선배를 거론하며 일본도 연구풍토가 자리 잡히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연구풍토에 대해 간혹 이야기를 한다. “연구생활은 단순한 생활이다. 아침에 연구소에 들어서면 누군가 벌써 끓여 놓은 커피의 진한 향이 뇌를 자극한다. 어디선가 열띤 연구이야기가 들리고 연구에 지친 입에서는 냄새가 풀풀 난다.” 그 때는 그런 입 냄새가 정말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입 냄새가 정말 그립다. 누군가 다가와 묻는다면 금상첨화다. What's new?라고.


아주대학교 종합정보지 '인간존중' 5호

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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