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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삶의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릴 때

NEW 삶의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릴 때

  • 박성숙
  • 2008-07-16
  • 47005

“그대의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Don't Give Up Your Desire)

 

     끊임없이 다가오는 많은 일들로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휩쓸려 가는 나의 삶에도 그 뿌리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한 감각의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문득 일깨워 준,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영화가 있다. 흥행기록이 저조했고 국내 비평가들의 평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지만, 2005년 칸영화제의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국제적인 호평을 받았던 영화 『달콤한 인생』(김지운 감독)이 그것이다. 언뜻 보기에 스토리가 단순하고 이미지나 스타일만 강조하는 이류 영화처럼 보이지만 어떤 스토리 중심적인 영화 못지않게 남자의 내면을 밀도 있게 보여주는 뛰어난 영화이다.

        

의미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주체의 욕망

     한 남자의 욕망의 흐름을 쿨하게 보여주는『달콤한 인생』의 스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별로 눈에 띄게 강조되지 않지만 영화의 흐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상징들이다.  이런 상징의 한 예는 영화의 맨 처음 쇼트다. 녹색 잎들로 무성한 버드나무 가지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카메라가 보여주는 동안 화면 밖의 목소리가 말한다: “어느 봄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라 네 마음일 뿐이다.”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이 나무막대 끝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라 내 마음일 뿐이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키는 이 대사는 나뭇가지(객체)가 물리적인 바람의 힘에 의해 흔들린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의 인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푸르른 나무처럼 생동하는 인간 주체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단 정한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정장 슈트 차림의 호텔매니저 김선우(이병헌)은 정확한 판단력과 원칙에 따른 냉정한 일 처리로 보스인 강사장(김영철)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강사장은 젊은 애인 희수(신민아)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선우에게 그녀를 감시하고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명령한다. 차가운 도시적 남성성의 전형인 선우에게 자신도 모르게 그만의 고유한 존재의 햇살이 비추고 푸르른 욕망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은 이렇게 희수를 감시하면서부터이다. 강사장의 명령에 따라 희수를 처음 방문할 때, 그가 희수의 집 앞에 차를 멈추자, 카메라는 차의 앞 유리에 희수 집의 정원수 잎가지들이 흐드러지게 비치는 것을 보여 준다. 차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바람이 휙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자 그는 멈칫한다. 선우가 죽기 전까지 희수에게 여러 번 익명으로 보내는 스탠드 등은 그녀가 그에게 삶의 빛을 던져주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다. 어둠과 빛의 뚜렷한 대조로 힘과 힘의 충돌, 힘에 의한 질서나 파괴를 상징하는 호텔 스카이라운지나 지하실 또는 선우가 머물게 되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희수의 집에는 전체적으로 빛이 환하며 생명의 빛인 녹색조명이 드리워져 있다. 

        선 우가 자기 집의 소파에 혼자 누워 스탠드 등을 껐다 켰다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정형적인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욕망의 전기가 들어왔음을 나타낸다. 스탠드 불빛 아래로 희수의 사진을 던지며 희수에게 전화하려다 멈추고 “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그에게 희수는 죽어있던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존재이지만, 그는 강사장처럼 그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자신의 다름(difference)을 인정하고 그녀가 일깨워준 존재의 달콤함을 자기 나름으로 즐길 뿐이다.  그러나 달콤한 인생의 빛을 향유하는 것도 잠시 뿐 선우는 스탠드 등을 켜는 순간 몰래 들어온 깡패들에 의해 개 잡히듯 끌려간다.


달콤한 감각, 자기존재의 근원적 뿌리

        강 사장은 부하들에게 선우를 생매장시킬 무덤을 파게 하면서 왜 희수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처치하지 않고 놓아주었는지 묻는다. 둘이 더 이상 안 만나겠다는 “약속만 지키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 생각했다”고 선우가 말하자 강사장이 “진짜 이유를 말해봐. 그애[희수] 때문이냐?”라고 재차 묻는다. 선우가 답하지 않자 강사장은 선우를 생매장시킨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진흙탕 무덤에 묻혔다 이를 뚫고 나온 선우는 또다시 굴복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죽음의 혈투를 벌인다. 청평의 폐공장에서 촬영된 이 액션장면은 액션장면으로서도 최고 일품이지만 그 싸움이 담고 있는 의미는 더욱 심장하다.  강사장이 선우의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멸감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희수를 소유하려다 실패한 자신과는 달리 선우는 희수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갖지 않지만--영화 전체에서 희수를 사랑하는 선우의 마음은 모호하고 절제 있게 나타나며, 희수는 끝까지 이 사실을 모른다--“그의 태도에 뭔가 달라졌기 때문에”, 즉, 그가 그녀를 통해 달콤한 인생의 향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철학자 라깡에 따르면 “시기(envy)”는 타자가 자기의 기대와는 다르게 즐기고 있다는 환상과 그 향유를 파괴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자기 동일적 소유의 방식에 따라 움직이는 강사장에게 그저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냥 가볍게 지났을 일”인데 왜 선우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가? 단순히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희수에 의해 일깨워진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요, 그녀와 더 이상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지만 그의 욕망 자체는 어느 절대권력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근원적 뿌리인 생의 달콤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선우는 정신분석학적 윤리학의 대명제, “너의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Don't give up your desire)”-여기서 욕망은 근원적인 욕망을 가리킨다-를 실천하는 우리 자신이라 하겠다.

 

<인간존중 6호  '영화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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