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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철학 읽어주는 남자 탁석산 박사 제10강좌 - 한국의 민족주의

  • 2008-07-16
  • 20910

제10강좌 - “한국의 민족주의”

  여지가 없다. 지금은 없어진 국민교육헌장에는 심지어 이런 말도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태어나보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 몰라도 어떻게 그러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날 수가 있는가.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국민이 되고 국민 된 도리를 다해야 하고 국론에 따라야 하며 대통령의 부인을 국모로 칭하는 신문을 보아야 하고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에 다녀야 하고 외국 여행은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국민은 국가의 부속물이다. 의무만 있고 국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해야 하는 존재가 국민이다. 국민은 국가의 감시대상이며 통합과 계몽의 대상이다. 이런 국민은 개개인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개개인의 이름보다는 주민등록번호라는 고유번호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데 더 유용하다.
  
  시민은 자신의 재산과 자유를 위해 국가를 선택한다. 국가의 부속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국가를 결성하는 것이다. 시민의 재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그 소임을 다 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영자를 바꾸든가 국가체제를 변혁하든가 아니면 국가가 아닌 국가연합을 택할 수 있다. 18세기의 프랑스 시민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아직도 유효한 세계적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시민은 자유, 평등, 박애가 보장되는 국가나 체제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즉 국가보다 이런 이념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은 자신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 이 땅에 태어났으므로 이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싫으면 이민을 가면 된다. 자신이 속한 국가를 변혁하든지 아니면 떠나면 된다. 이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프랑스 시민혁명의 가치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유럽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이곳에는 이곳의 상황이 있다는 반박을 흔히 한다. 나는 이런 반박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체제 형성의 한 부분이다. IMF 사태 이후 외국자본은 우리에게 국제 회계기준에 맞는 회계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거부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만의 기준, 우리만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끼리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노조 문화를 다른 나라와 달리 과격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으나 외국인에게는 관심 밖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공감 할 수 있는 노사 문화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세계체제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체제 밖에 있으면 북한처럼 경제난을 겪게 되고 고인 물처럼 정체하고 말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는 분명히 표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표준을 어렵게 성취했는데 유럽에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허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의 코미디에 등장한, 산에 애써 올라간 젊은 사람과 같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올라가보니 이미 할머니가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관계없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므로.

  민족은 시민과 관련이 없다. 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한민족의 피를 이어받아야 다거나 한국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 한국인이 되기도 하고 축구 선수‘신의 손’은 한국이 좋아 한국에 귀화했다. 이런 일은 앞으로 더욱더 확산될 것이다. 즉 민족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중 하나인 핏줄은 점점 더 희석될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가 고립된 섬처럼 다른 나라와 별 교류 없이 지내온 것을 증언한다. 따라서 머리색, 눈동자의 색 등 눈에 띄는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즉 외침의 주역은 모두 같은 황인종이었으므로 핏줄은 아주 당연하게 민족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이미 이민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의 동포는 우리에게 민족의 동질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인이 한국의 시민이 된다면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 그럴 경우 외국인은 한국어에 민족의 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생활을 위해 한국어를 익히는 것뿐이지 한국어를 익힘으로써 한민족의 얼을 전수받는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경우를 바꾸어보자. 한국 사람이 코스타리카에 가서 살기로 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스페인어를 배워야만 생활할 수 있다.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스페인어에 코스타리카의 혼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또 다른 언어를 배운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의 경우 한국어와 민족의 혼이 너무 밀착해 있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이런 밀착이 훨씬 더 강화되었다는 역사의 특수성이 있지만 적어도 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부를 단계에는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어도 세계의 여러 언어중 하나라는 견해를 가질 때가 되었다. 한국어를 한민족 정신의 화신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어에만 민족정신이 서려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호주 사람은 영어를 사용하는데 그 영어에 호주의 민족정신이 서려 있을까? 호주의 민족정신이 있다면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는 사유와 정신에 있을 것이다.

  국민이 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시민국가가 되는 것이 세계체제와도 합치하고 개인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면 이것이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우선 시민국가라면 국민국가가 아니다. 국민국가와 시민국가의 차이점은 앞서 말했다. 다음으로 시민국가라면 민족국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시민은 민족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시민국가를 지향한다면 민족국가를 이루려는 열망은 허망하게 될 것이다. 민족국가가 의미를 잃는다면 민족통일을 이루어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의 오랜 소망도 의미를 잃는다. 시민의 사유재산과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국민국가든 민족국가든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는 북한과 민족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북한은 홀로 예외적인 지역이나 국가가 될 수 없다. 왜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야 하는가? 세계체제 속에서 볼 때 북한의 개인은 표준 이하의 수준에 있다. 같은 민족이므로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야 한다면 민족통일을 위해 남한의 개인을 억압하는 것도 보장해야 한다.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에도 시민이 등장해야 한다. 사유재산과 정치적 자유를 가진 시민계급이 등장할 때 우리는 북한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시민국가의 외연 확대라는 측면에서 더욱더 공고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