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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16.07.26.] 냉랭한 왕이, 환대하는 케리…고차방정식 직면한 한국 외교

  • 김흥규
  • 2017-01-31
  •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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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왼쪽) 장관이 24일 밤(현지시간) 라오스 비엔티안 돈찬팰리스호텔에서 중국 왕이 외교부장을 만났다. 왕이 부장은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결정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이날 회담은 지난 8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이뤄진 양국 고위 당국자 간 첫 만남이다. [사진 외교부]


한국 외교가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에 직면했다. ‘미·중 모두와 최상의 관계 유지’를 추구했던 외교기조가 거센 외풍으로 뒤뚱거리는 모양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24~25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중국·일본·미국 등 주요국 외교수장들과 연쇄회담을 했다.

윤병세 “풀 없애려면 뿌리 뽑아야”
고사성어 쓰며 북핵 근원해결 설득
왕이 턱 괴고 손사래 외교적 결례
전문가 “한·중관계 유지 뜻 전달을”
케리, 남중국해 문제 언급했지만
윤 장관은 특별한 발언 안 해


윤 장관은 24일 오후(현지시간)에 만난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으로부터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결정과 관련해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왕 부장은 “한국의 최근 행위가 신뢰를 훼손시켜 유감”이라는 말까지 했다.

지난해 8월 같은 회의가 열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의 회담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윤 장관이 “양국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여러 도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극복하지 못할 사안은 아니다”고 설명했지만 왕 부장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왕 부장은 윤 장관의 발언에 손사래를 치거나 턱을 괸 채로 발언을 듣는 ‘외교적 결례’에 가까운 행동도 했다고 한다.

윤 장관은 고사성어까지 써 가며 중국 측을 달래려 애썼다. 사드를 거론하면서 ‘봉산개도 우수탑교(逢山開道 遇水搭橋)’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는 말로,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북핵 관련 논의를 할 땐 ‘추신지불 전초제근(抽薪止沸 剪草除根)’이란 표현을 썼다. ‘아궁이 장작불을 빼면 물을 식힐 수 있고 풀을 없애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냉랭한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양자회담의 풍경이 한국이 처한 어려운 외교적 환경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윤 장관은 25일 오후엔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을 만났다. 윤 장관은 평소 케리 장관과 “My friend John(내 친구 존)”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친한 사이다. 이 자리에서 두 장관은 사드 배치와 관련, 동맹 차원의 결정을 평가하고 한·미 연합 방위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는 데 공감했다고 외교부 당국자는 전했다. 또 이번 한·중 외교장관회담 등이 중국과 중요한 소통의 계기가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추가적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케리 장관이 남중국해 문제를 언급하자 윤 장관은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한·중 관계를 배려한 것이다.

고려대 남성욱 통일외교안보학부 교수는 “한국은 당분간 로키로 갈 수밖에 없으며 중국을 설득하는 것 이외에 마땅한 카드가 없다”며 “사실상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냉정하고 차분한 외교가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북한 대 국제사회의 구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라며 “한·중 관계의 손상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중국에 명확하고도 꾸준히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주대 김흥규 중국정책연구소장은 “친한정책을 펴온 중국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중 간 충돌사안이기에 양측이 해결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