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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20.06.09] “한국, G2 중 편들기 아닌 ‘가치 중심적 대응 전략’ 필요”

  • 김흥규
  • 2020-06-24
  • 757

美, ‘反중국 경제블록’ EPN 참여 압박 / 中, 홍콩국가보안법 지지 요청 노골화 / 한국 “예의주시” 회피성 발언만 계속 / ‘전략적 모호성’만으로는 대처에 한계 / 선택 강요받아도 정체성·국익 고려해야 / ‘동병상련’ 호주·印·아세안과 연대 필요 / 한국 외교자원, 북핵 문제에만 집중돼 / 유연한 의사결정과 인적 인프라 한계


“더욱 심해지고 있는 자국 중심주의와 강대국 간 갈등도 우리 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비상경제회의에서 우리 경제가 직면한 세계 경제의 위험 요인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미·중 갈등이 이미 한국 경제에 대한 위협 요인으로 상수가 됐음을 확인한 셈이다.


무역과 기술표준 등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외교안보, 인권, 환경과 보건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미·중 경쟁은 이미 한국 국가전략 형성의 상수로 취급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주재한 외교전략조정회의도 사실상 미·중 경쟁을 우리 외교의 가장 큰 도전과제로 설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각 부처와 민간 전문가들이 모인 회의였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는 이전보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세계의 변화 속도를 훨씬 앞당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구나 한국의 양 팔을 잡아당기는 미·중의 압박도 이전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거세지는 양상이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8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미·중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온 지금까지는 우리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을 통해 일시적으로 문제를 회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지금부터는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양국이 한국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도리어 압력을 높이는 상황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략적 모호성’은 한계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보여온 대응은 ‘전략적 모호성’에 기반한 대응이 대부분이다. 김 교수는 “현재와 같은 긴장 격화 국면에서 지금까지의 전략적 모호성으로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시기”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이 추진 중인 반(反)중국 경제블록 구상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참여 압박,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지지 요청 등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회피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과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나 남중국해 분쟁 등에서도 취했던 방식이다.

 

다른 대응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한 정부 관계자는 “현재 주시한다는 것 외에 우리 정부가 외부적으로 할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이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강 장관 역시 외교전략조정회의에서 “최근 고조되는 국제사회 갈등 및 그 파급 효과와 관련한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며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히는 것 외에 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미·중 모두 모르지 않으며, 따라서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하면 미·중도 이해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부가 취해 온 전략적 모호성의 기저에 깔린 생각이다. 하지만 사드 배치와 이로 인한 논란부터는 이 전략에 한계가 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사국 연대 등 새 대응전략 세워야”

 

최근 부각된 대응 전략은 ‘가치 중심적 대응’이다. ‘어느 나라의 편’이 아니라 ‘어느 가치의 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 국익을 정의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룬 뒤 이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상황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싱가포르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지지를 표명하면서도 역내에서 특정 국가를 배제하거나 분열시키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정부가 ‘유사입장국’으로 통칭하는 같은 처지의 국가들과의 연대도 요구된다. 한국이 최전선에 있기는 하지만, 미·중 경쟁과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국가는 우리만이 아니다. 호주, 인도,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은 대표적으로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나라들이다. 특히 아세안 국가들은 연대와 공동 대응을 통해 미·중 사이에서 공간을 넓혀온 역사가 깊다. 이른바 ‘헤징(hedging·위험 분산)’ 전략이다.

 

주어진 환경을 역으로 능동적으로 이용할 전략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정부 관계자는 “(미·중 갈등이) 한국에게는 까다로운 도전이지만, 역으로 주어지는 기회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G7(주요 7개국) 회의에 초청한 것이 한 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한국 정부의 G7 회의 참여에 대해 “미국의 (중국 견제) 의도를 알되,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위기 대응 능력은

 

정부가 지금까지 내놓은 방향도 대개 이 흐름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지난달 28일 정부의 전략조정회의도 사안별로 미·중 모두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은 협력하고,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 큰 축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정부가 이를 추진하기에 얼마나 적합한 유연한 의사결정구조나 제도적, 인적 인프라를 갖고 있느냐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장은 “북핵 문제 위주로 설정돼 있는 현 정부의 인적, 제도적 구성으로는 새로운 도전에서 효과적 대응을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 전문가는 “국제회의를 가보면 다른 나라들은 이미 미·중 경쟁과 관련한 이슈에 관심을 돌리고 자원을 집중한 지 오래인데, 우리는 여전히 북핵 문제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는 한반도의 숙명적인 아킬레스건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관심의 비중을 조정할 때도 됐다는 얘기다. 정부는 지난해 전략조정지원반을 외교부 내에 설치했지만 이 기구는 국장급이 지휘하는 실무 자문기구로, 범정부적 전략을 총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황 관리 전략도 중요하지만 개별 사안에서의 ‘최후의 선택’에 대한 준비도 구체적으로 병행돼야 한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이미 시작된 기술표준 분야의 미·중 경쟁에서 어느 질서를 따를 것인가가 한 예다. 박지영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미·중 기술패권경쟁의 의미’ 보고서에서 “선택이 늦어질수록 새로운 질서 수립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가질 기회는 없어진다”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