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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뉴스 2017.07.08.] [클로즈업 북한] 최고지도자 없는 북한 외교..정상회담은 언제?

  • 김흥규
  • 2017-07-12
  • 939

[클로즈업 북한] 최고지도자 없는 북한 외교…정상회담은 언제?


<앵커 멘트>

앞서 소식 전해드렸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등을 만나며 활발한 정상 외교를 펴고 있는데요.

이에 비해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집권 6년차를 맞고 있지만 좀처럼 정상외교 무대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핵 도발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북한 외교의 자화상이기도 한데요.

<클로즈업 북한> 이번 주에는 북한 정상 외교의 역사를 돌아보고 김정은식 외교의 현주소를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1975년 4월, 중국 베이징.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을 덩샤오핑이 직접 맞이하며 환대하는 모습.

<녹취> 北 기록영화(‘만민이 우러러 칭송하는 우리 수령님’) : "대륙과 대륙에 끝없이 메아리친 환호성은 우리 수령님께 자주 시대가 드리는 최대의 경의였습니다."

당시 북한 정상 외교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해외 순방에 자주 나서며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친 김일성.

그중에서도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 외교의 가장 중요한 축이었다.

<녹취> 김일성 중국 방문(1953년 10월) : "1953년 10월, 위대한 수령님과 상봉한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는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조선 인민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6.25 전쟁에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낸 김일성은 전쟁 후에도 돈독한 관계를 다져 나갔다.

과거 ‘동북항일연군’이라 불리던 중국과 조선, 소련인으로 구성된 항일연합부대에서 김일성이 활동한 이력이 이 같은 유대감을 바탕으로 김일성과 중국 1세대 지도부 사이 끈끈한 정상외교가 이어졌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前 북한 외교관) : "일제를 반대해서 같이 싸웠다, 미제를 반대해서 같이 싸웠다, 이런 것들이 그리고 또 이념의 공통성, 공산주의·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념의 공통성, 그리고 두 나라 지도자들 사이에/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그러니까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강택민, 후진타오 이런 식으로 계속 내려오면서 계속해서 그것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두 나라 사이의 지도자들의 관계는 돈독했고 심지어 모택동이나 주은래는 김일성 보고 피곤하면 언제든지 중국에 오라. 중국이 바로 너네 집이다... 그래서 김일성이 중국에 자주 갔고..."

냉전 시대 미국에 대항해 중국·소련과 이념적 결속을 다진 김일성은 1960년대 적극적으로 외교 관계를 다변화한다.

<녹취> 北 찬양가(‘김일성 장군의 노래’)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김일성 앞에서 찬양가를 부르는 에콰도르 소년 소녀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김일성.

아프리카 정상 방문단은 흥겹게 춤까지 추며 노래를 부른다.

<녹취> 北기록영화(‘만민이 우러러 칭송하는 우리 수령님’) : "잠비아 공화국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는 일행과 함께 초원의 노래, 영광의 노래를 드렸습니다."

국제사회에서의 표 대결을 의식해 김일성은 중남미와 동남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해 가며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친다.

특히 쿠바와는 1960년 수교 이후 반세기 넘게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어왔다.

<녹취> 北 기록영화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쿠바의 당 및 국가의 수반 피델 카스트로 동지와 뜻깊은 상봉을 하셨습니다."

옛 공산권이 붕괴되는 시기에도 김일성은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의 각별한 친분을 바탕으로, 협력을 다져 나갔다. 이러한 김일성의 공격적인 정상외교를 바탕으로 북한은 1980년대 말까지 외교 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김정일 시대에도 정상외교는 중요하게 인식됐다.

특히 중국은 김정일이 후계자 시절부터 방문했는데, 비공식 방문도 잦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녹취> 北 기록영화(‘위대한 김정일 동지는 세계 정치의 원로이시다’) : "세계의 자주화 위업과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친선 단결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1983년 6월 역사적인 중국방문의 길에 오르신 위대한 장군님..."

그러나 '은둔의 지도자’라 불릴 만큼 아버지 김일성과는 대조되는 행보를 보이던 김정일이 베일을 벗었다는 자평까지 내놓은 계기는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녹취> 김대중 前 대통령(2000년 6월) : "외국 기자들도 수백 명 있는데 천여명 기자들이 기립박수를 했다고 그래요, 우리가 공항에서 악수할 때..."

<녹취> 김정일(2000년 6월) : "구라파 사람들은 자꾸 뭐라고 말하냐면, 왜 은둔 생활을 하나,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 처음 나타났다...나는 과거에 중국도 갔었고 인도네시아도 갔었고 외국에 비공개로 많이 나갔는데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대그래서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前 북한 외교관) : "김일성은 나서기 좋아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으니까 외국 수반들하고 외국인들하고 만나는 것을 즐겼고 그리고 외국에 나가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렇지만 김정일은 사람 만나는 것을 주저하고 많이 만나질 않고 외국인들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그래서 두 지도자의 성격은 완전히 판이한 성격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할 것 했다는 것이 주로 미국하고 중국하고의 뭐 푸틴 만나고 그리고 그전에 강택민, 후진타오 다 만나고 모택동 만나고 중국하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계속 만났죠."

김정일도 중국과의 관계는 가장 중시했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계기로 북중관계가 크게 흔들렸지만, 2001년 중국을 방문한 뒤엔 중국의 경제 성장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녹취> 조선중앙TV(2001년 1월) : "김정일 동지께서는 세계가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해는 천지개벽되었다고 하시었습니다."

이후 김정일은 사망 직전까지 중국과의 정상외교에 주력했다.

이는 불안한 후계자 김정은을 염두에 둔 행보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인터뷰> 김흥규(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마지막에 김정일 위원장이 계속 중국을 방문했던 이유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는 상황에서 김정은에 대한 어떤 후계자를 이제 체제를 구축하는데 중국이 인정해 주고 도와달라 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중국이 빠르게 상황을 안정화시키고 그 다음에 김정은 체제를 용인하는 조치를 취해준 것은 바로 이런 김정일의 막판 외교에 덕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정일 사망 이후 세계의 이목은 김정은의 외교 활동에 집중됐다.

열병식 등에 외신 기자를 대거 초청해 근접 취재를 허용하는 등 유학파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파격적인 행보는 한때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김정은의 국제무대 데뷔는 기약이 없다.

특히 시선이 쏠렸던 계기는 2015년 잇따라 열렸던 러시아와 중국의 2차 대전 승리 70주년 기념행사.

김정은의 참석이 예상되기도 했지만, 결국 러시아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중국엔 최룡해 노동당 비서를 대신 보냈다.

<녹취> 한진명(前 북한 외교관/2015년 탈북) : "김정은이가 자체 나이가 어린데 그 사람이 그 해외순방을 다닌다는 게 좀 어처구니 없으니까 자기도 자기를 알고 안 나가겠죠. 그러니까 자기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김정일 때처럼 김영남이나 이 사람들은 전면에, 말하자면 노장파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기는 뒤에서 숨은 정치를 하는 거예요."

시진핑과 함께 나란히 선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끄트머리에 자리한 최룡해의 모습이 당시 북중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후 지난해 6월, 북한의 리수용 당 부위원장이 시진핑과 면담하고 김정은의 구두 친서를 전달하면서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시진핑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면서 양국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인터뷰> 김흥규(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일단은 본인도 가기 싫어하고 중국도 그런 상태에서는 초청하기 싫으니까 안 하는 것이기도 하고 못가는 것이기도 하고... 과거에는 북한의 대외 전략은 아무리 호전적이라도 스스로는 약소국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정은 시대에 핵을 개발하면서 중국에 대해서 전혀 어떤 존중이라든가 중국의 이해를 봐 가면서 북한의 정책을 조정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정상회담이라든가 서로간에 어떤 이해의 교환이 어려워지는 거죠."

2015년 중국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의 방북 이후 그 이상의 고위급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개최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정은은 19년만에 외교위원회를 복원하고 외교라인을 재정비 했다.

<녹취>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5차 회의(2017년 4월) :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리수용 대의원...."

시진핑과의 면담에 나서기도 했던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을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앉힌 것은 의회 대 의회 외교를 강화해 돌파구를 찾겠다는 의도로 평가된다.

북한이 핵개발을 강행하며 최근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은 대미 관계다.

유엔 대표부를 활용한 이른바 ‘뉴욕 채널’이 있지만 최근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은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이다.

지난해 6월 북한의 무수단 미사일 발사 이후 최선희의 기자회견 모습.

<녹취> 최선희(북한 외무성 미국국장/2016년 6월) : "이제는 우리가 미국이 어떠한 핵전쟁을 강요해도 당당히 상대 해 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기쁩니다."

동시에 미국 측과의 물밑대화 모습이 잇따라 포착되며 주목받고 있다.

군사적 긴장 조성 이면에서 나름의 대화 타진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근거다.

<인터뷰> 김흥규(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김정은이 아마 그랜드 디자인 가지고 있다면 일단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서 핵 국가로서 인정받으면서 강국으로서 자신의 어떤 국가 안전을 그리고 정권의 안전을 확보해내고, 그리고 나서는 훨씬 더 유연하게 아마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할 겁니다. 일단 군사 역량은 확보되어 있고 체제의 안전성 확보됐고, 그렇다면 외교 역량을 통해서 이제 경제적인 역량이라든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가 있고 그래서 그거에 대한 대비책을 지금 이미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조만간에 북한이 상당히 과감한 공세적인 외교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우리가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고립의 모양새를 취하지만 핵과 미사일로 또 다른 외교의 판을 짜고 있다는 분석.

그러나 그러한 전략이 정권을 오히려 취약하게 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前 북한 외교관) : "계속해서 외국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고 내구력은 약화되고 거기다 제재가 심해지고 그러니까 사실 안보적으로는 더 위험한 상황이거든요. 사실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위험이 더 약화되는 건 아니고 또 내부로부터 위로 향한 압력도 강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집권 6년차를 맞도록 제대로된 정상외교 한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북한 외교의 현실이다.

공포정치에 기댄 불안한 통치 방식, 군사적 긴장 고조에 기댄 대외 정책이 가져온 2017년 북한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