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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20.06.23] 北 ‘불가역적 핵보유·新자력갱생’ 선언… 향후 1년은 ‘도발의 시간’

  • 김흥규
  • 2020-06-24
  • 301

■ 北 잇단 강경도발 배경·전망

‘文정부 대북제재 해제 중재’ 불능 판단… 노골적 대남 비난·도발로 ‘돌아오지 못할 강’ 건너는 듯

美가 대선 전후 강경노선 펴기 힘든 점도 노린 듯… 韓, 核 아닌 방식으로 ‘공포의 균형’ 이뤄야









청와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질 것 같다.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김여정은 6월 13일 한국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3일 후 남북공동 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비무장지대(DMZ)에 대남확성기를 다시 설치했고, 무장한 군인을 배치하는 수순을 밟는 중이다. 국지적인 군사 도발도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간에 합의된 ‘4·27 판문점 선언’ ‘9·19 평양 공동선언’ 및 ‘9·19 군사 분야 합의서’ 등이 모두 형해화되는 순간을 맞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남북 공존의 원칙을 강하게 제시했고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북이 문 대통령과 한국 정부를 모욕하는 수준을 보면 거의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것으로 보인다.

북은 왜 이 시점에 이토록 노골적인 적의를 문 정부에 드러낼까. 북이 말하려는 건 뭘까. 극적인 반전 계기가 없는 한 북한은 문 정부를 향한 기대를 접고, 트럼프 미 행정부에 대해서는 ‘불가역적 핵 보유’를 완성하겠다는 사인을 보내며, 중국에 대해서는 친중(親中)적이지만 종속되지는 않겠다는 ‘신(新) 자력갱생’ 전략을 택한 것으로 읽힌다. 이에 따라 문 정부의 외교·안보·대북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와 수정이 필요해졌다.

◇‘기대 끊는다’는 대남 메시지

한국 내 북한에 대한 시각은 크게 양분된다. 하나는 음모적이고 사악한 이미지다. 6·25전쟁의 아픔과 냉전, 오랜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 상황은 이런 전제를 쉽사리 받아들이게 했다. 다른 하나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약소국의 모습이다. 악마와 약자, 이 두 시각은 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남북한은 역사적 경험과 분단 현실로 오랫동안 극도의 상호 신뢰 부족과 안보 불안 상태에 처해 있었다. 또 서로 상대에 대해 안보 불안을 극복할 만한 자신감과 역량을 확보하지도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는 ‘의지의 영역’이 아닌 ‘구조의 영역’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재래식 군사 역량에서 열세인 북한의 안보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현상 변경’의 무기로 쓰일 수 있어 한국의 안보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런데도 북이 자신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분명한 대안이 없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건 분명하다.

현재의 한국은 북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능력이 없다. 한·미 동맹에 대한 안보 의존성이 큰 데다가 국내적인 갈등을 억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문 정부가 아무리 비핵·평화 구상을 제시하고 선의를 보여도,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는 한, 북은 핵무장과 군사력 강화를 추진할 것이다. 특히 지난해 2월 미·북 정상회담 ‘하노이 노 딜’ 이후 지금까지 문 정부의 미국 설득 및 대북제재 해제 노력이 실패한 경험을 겪으면서 더 이상 남측에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했고, 이것이 문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과 대남 도발을 만들어냈다.

◇향후 1년 대미 ‘도발의 시간’

미·중 전략 경쟁 격화로 북한의 대외적인 전략 운용 공간도 크게 축소됐다.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 협력을 하는 시기에 남과 북은 상호 안보 불안을 어느 정도 완화하며 타협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중 경쟁이 격화하면서 그 공간은 사라졌다. 북한이 중국의 이해를 넘어서는 북·미 대화를 추진하면서 안보 불안을 타개하기는 힘들다. 미국의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과의 대결적 관계를 벗어날 공간은 거의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에 따라 북은 미국과 대립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전략적 유용성을 추구하겠다는 판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의 도발은 핵보유국 지위를 얻고 자력갱생의 길을 걷겠다는 메시지다. 북한은 연말 미 대선 이후로도 최소한 반년까지, 즉 지금부터 약 1년은 미국이 대외 강경 노선을 펴기 힘든 ‘도발의 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북의 도발과 신 자력갱생 전략 채택은 2019년 10월 스웨덴에서의 미·북 접촉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미 그런 방향으로 정책적 전환이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다만 그들이 ‘새로운 길’을 걷겠다고 공언한 시점인 지난해 말까지 중대한 도발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미·중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북한 변수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던 중국의 강력한 견제가 작용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미·중 경쟁과 북의 선택

북의 최근 대남 도발이 중국에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걸까. 북한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이나 한국이 유엔의 대북 제재를 해소해 주지 못하는 한 북한 경제는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고, 결국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인 게 현실이다. 그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5차례 회담을 통해 정권과 체제 유지에 긴요한 식량 및 에너지 공급을 확보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북·중 국경 봉쇄로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체제 유지는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북은 대남 도발을 통해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 즉 한반도 안정을 흔들어버릴 카드를 활용함으로써 중국의 지원을 받아내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중 전략 경쟁 과정에 북한 변수가 돌출하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껄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중국을 겨냥, 미·중 전략 경쟁 시기에 중국 편을 들겠지만, 중국 경제의 영향권으로 완전히 편입되거나 정치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자율성을 확보할 최소한의 장치로 핵무장을 계속하겠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대응 시나리오

지금 김 위원장의 ‘부재(不在)’가 길어지고 김여정 제1부부장이 지나치리만큼 나서서 대남 도발과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상황이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를 둘러싼 해석이 난무하지만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중요한 건 북한의 새로운 자력갱생 전략이 문 정부의 외교·안보·대북 정책에 근본적인 도전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이는 정책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의 문제다. 즉 문 정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시점에서 기존 대북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건 우리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한국의 대북 정책 옵션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전략적 인내, 북핵과의 동거, 강제적 비핵화 추진, 그리고 억제력 강화를 통한 ‘공포의 균형’ 도달. 이 중 어느 것이 새로운 외교·안보·대북 정책의 프레임을 설정하는 최선의 방책일까. 전략적 인내를 통한 평화 체제 구축은 구조적으로 작동하기 힘들다. 첫째 방안은 불가(不可). 북핵을 용인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비핵화시키는 방식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남은 방안은 억제력을 강화해 ‘공포의 균형’에 도달하는 ‘국방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의 ‘공포의 균형’은 북핵에 대해 ‘남핵(南核)’으로 대응하는 게 아닌, ‘핵을 억제하는 가공할 비핵(非核) 체계 구축’에 따른 것이다. 이럴 때 국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자율성을 강화할 수 있으며, 이 같은 전제 아래 북에 대화와 협상을 힘있게 요구할 수 있다.


■ 세줄 요약

북 도발과 신 자력갱생 선언 : 북한의 대남 도발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겠다는 생각을 보여준 것. 특히 ‘하노이 노 딜’ 이후 문 정부의 미국 설득과 대북제재 해제 노력이 실패하자 북은 더 이상 남측에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하고 ‘신 자력갱생’ 선언을 한 것.

미·중에 대한 메시지 : 북은 미·중 전략 경쟁 시기에서 미국과의 대립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를 얻겠다고 결정한 것임.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경제에 편입 또는 종속되지 않고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핵무장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

북의 도전과 한국의 대응 : 북의 자력갱생 전략은 문 정부에 도전을 안겨줌. 기존 대북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한국의 입지를 약화시킴. 북핵에 대응해 가공할 비핵 체계를 구축해 억제력을 강화하고 ‘공포의 균형’에 도달하는 ‘국방개혁’을 추진해야 함.

■ 용어 설명

‘하노이 노 딜’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미·북 정상회담이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된 것. 김정은이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전면적 제재 완화’ 간의 딜을 시도했지만, 트럼프가 이를 전격 거부함.

‘자력갱생’은 원래 주체사상의 지도적 지침으로, ‘경제에서의 자립’을 뜻했던 개념. 김일성은 “우리 스스로 벌어먹으며, 경제 모든 부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종합적 경제체계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