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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20.04.26][차이나인사이트] 힘 앞세운 마오쩌둥·장제스에 휘둘린 장쉐량의 민족우선론

  • 김흥규
  • 2020-04-27
  • 338
1930년대의 중국이 한반도에 주는 교훈

역사에 반복은 없다.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종 역사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유추의 방식을 통해서다. 오늘날 국제정세와 남북한이 당면한 상황은 90여년 전 중국의 지도자들이 직면했던 현실과 너무 흡사해 보인다. 일본의 압박과 침략의 위협 속에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주요 지도자들은 부강한 중국을 만들고자 고뇌했다. 이를 위해 중국 내부를 우선 평정해 통일을 추진할 것인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을 우선할 것인지를 놓고 다른 해답을 추구했다. 해답은 네 가지, 즉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방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     

“약육강식의 안보환경에서 내부 역량을 집중·강화하는 데 실패한 채
전술적인 중개자 역할을 추구하는 장쉐량의 길은 위험하다.
북한은 남북 화해와 평화에 호응하는 대신 장제스의 길을 추진하려 한다.
남북으로 장제스와 장쉐량 노선의 조합이 이뤄지는 건 한국에 최악이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중국 내 세력 균형에서 열세임을 잘 인식했다.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중국을 침략한 외세에 대한 대응은 부차적이었다. 힘이 약한 상황에서 대일 항전이나 국민당과 접전은 최대한 피했다. 러시아와 같은 외세를 끌어들여 의존하면 훗날 위험해질뿐더러 소모적이라 여겼다. 철저히 자력갱생에 근거했다.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전략을 밀어붙였다. 마오의 전쟁론은 1938년 『지구전을 논함(論持久戰)』에 담겼다. 방어→대치→반격으로 이어지는 3단계 전략이다. 힘을 앞세운 마오는 결국 중국 통일에 성공했다.
 
국민당의 일인자였던 장제스는 중국 내 주도권과 통일을 우선 추진했다. 장제스에게 외세 대응은 통일 이후의 일이었다. 밀려오는 일본에 대한 대응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른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讓外)로 알려진 정책이다. 마오쩌둥과 비교해 중국 내 세력 균형에서 국민당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장정(長征)이란 이름 아래 쫓기는 공산당에 군사 공세를 강화했다. 중국 내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통제할 수 없는 외세 변수에 집착하기보다 중국 내부 통합을 앞세웠다.
  
힘 없이 중재 매달린 장쉐량의 실패 

청(淸)의 국비 일본 유학생 출신 왕징웨이는 혁명가였다. 마지막 황제의 아버지 짜이펑(載灃)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이후 국부(國父) 쑨원(孫文·손문)의 연설 담당 비서와 국민정부 요직을 섭렵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폭발하자 국민당 이인자였던 그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며 ‘평화운동’을 주장했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당시 일본 총리와 동아시아의 영구평화, 선린우호 등에 합의했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인다는 명분을 앞세워 안보를 외세에 떠넘긴 채 1940년 난징(南京)에 친일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과의 우호를 국정 최우선에 뒀다. 매국노로 낙인 찍힌 그는 일본 패망 직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쉐량은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아들이다. 1928년 일본군의 열차 폭발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후 반(反)외세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해 일본에 맞서야 한다고 믿었다. 1936년 시안(西安)에서 장제스를 무장 납치해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외세에 대응할 자체 역량을 갖지 못했다. 중개자에 만족했던 그의 여생은 비참했다. 평생을 가택 연금 속에 살았다. 뜻했던 국공 합작도 내전이 발발하면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북한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고난의 길과 선군 정책을 선택했다. 마오쩌둥의 길을 걸은 셈이다. 생존을 추구하는 ‘연약한 약자’의 모습이었다. 김정은 시기 핵·미사일 개발에 성공하면서 ‘강국’ 됐다고 자처한다. 스스로 안보를 확보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최근 일련의 단거리 미사일과 방사포의 발사 실험에 성공하면서 이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마오쩌둥에서 점차 통일을 앞세운 장제스의 길로 전환하는 듯 보인다. 이를 위해 ▶자력갱생 ▶핵·미사일 및 대(對)한국 무력강화 ▶중·러와 협력을 추진한다는 전략 기조를 정했다.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미국과는 전략적 타협을 하는 모험은 어렵다. 북한의 입장에서 중국의 보복은 견디기 어렵고, 미국은 신뢰할 수 없다. 중국은 북한 정권의 생존을 보장하면서도 관리하고 견제하려 한다. 김정은은 결국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북한의 각종 단거리 미사일과 방사포는 방어가 불가능하다. 이는 주한 미군의 한반도 철수로 이어지기 쉽다. 북한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작전 참모부’ 역할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정책을 추진할 전망이다.
  
장제스 닮아가는 북, 장쉐량 닮은 한국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일촉즉발의 한반도 긴장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한미 동맹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왕징웨이의 길에서 벗어났다. 보다 민족주의적 해결책을 추진했다. 남북관계에서 소멸이 아닌 공존을 앞세웠다. 바로 장쉐량의 민족주의 노선과 가깝다. 남북 화해를 통해 외세 의존과 압박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장쉐량 당시의 중국은 중일전쟁과 2차 세계 대전의 폭풍우에 휩싸였다. 지금은 미·중 전략경쟁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당시 마오쩌둥은 장쉐량을 이용해 힘 불리기에 열중했다. 궁극적으로는 내전의 승자가 됐다. 정글 같은 약육강식의 안보환경에서 내부 역량을 집중·강화하는 데 실패한 채 전술적인 중개자 역할을 추구하는 장쉐량의 길은 위험하다. 김정은의 북한은 생존에 급급한 ‘선한 약자’의 모습이 아니다. 남북 화해와 평화에 호응하는 대신 장제스의 길을 추진하려 한다. 남북으로 장제스와 장쉐량 노선의 조합이 이뤄지는 건 한국에 최악이다.
 
현시점에서는 북한의 무력에 ‘공포의 균형’ 역량을 갖추는 것이 평화와 남북 안정의 기본 조건이다. 무력과 공포의 대칭성을 확보하지 않은 평화는 위태롭다. 동맹의 활용은 부가 옵션이다. 총선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밀려오는 위기에 맞서기 위해 내부 역량을 응집해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처과정에서 높아진 국제 위상에 우쭐하기보다 이를 활용해 생존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숙의해야 한다. 외교·안보 분야에 자원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평화유지는 물론, 다가오는 국제정치의 파고와 북한의 도전을 이겨내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 동상이몽

전략경쟁 시기 미·중의 한반도 정책 선호도는 상반된다. 미국의 최우선적인 선호는 친미적인 북한이 중국을 견제해주는 구도일 것이다. 차선이자 현실적인 방안은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북한의 핵 보유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핵무기 현대화, 동아시아 지역 중거리 탄도미사일 배치, 우주의 무기화 정책을 진행하는 자양분이 되고,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 압박에도 유용하다.
 
중국의 입장에서 최우선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북한의 친미화를 반드시 방지해야 하고, 동시에 의미 있는 수준까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차선은 동아시아 분할 방안이다. 북한의 대중 종속화, 한국의 중립화, 일본의 복합외교(미·중 등거리 외교) 수립을 추동하는 것이다. 북한이 현재 노리는 한반도 주도권 확보 전략은 이러한 중국의 이해에 상응하면서 추진되고 있다.
 
현재 미국은 차선, 중국은 차차선인 현상유지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점차 차선의 정책을 추진하려 할 것이다. 한국은 이 경우 미·중 양쪽으로부터 강한 선택의 압박을 받는다. 북한에 대한 희망 섞인 평화적 공존 패러다임으로는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될 개연성이 크다. 대항적 공존 정책으로 전환이 시급하다. 북한과 대항(경쟁)성을 현실로 인정하고, 내적 대응역량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 힘을 바탕으로 공존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최악의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주변 강대국에 대해서는 자강에 방점을 두고, ‘최소 억제전략’을 구현해야 한다. 평화공존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다.

[출처: 중앙일보] [차이나인사이트] 힘 앞세운 마오쩌둥·장제스에 휘둘린 장쉐량의 민족우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