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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21.1.12] 文 ‘민족 우선’ 외교 속 한·미관계 ‘늪’에…‘동맹의 방기’ 부를 수도

  • 김흥규
  • 2021-01-25
  • 254
■ 결산과 전망 ② 외교·한미관계

낭만적 대북관·외교력 빈곤·美中 갈등 대응 미숙해 신뢰의 위기… 양국동맹, 常數 아닌 變數化
바이든 ‘對中 가치동맹’ 내세워 ‘美 국익에 순응하라’ 메시지… 北과 ‘민족공존’보다 韓 ‘생존이익’ 수호 우선돼야

문재인 정부의 외교 비전은 ‘민족주의’에 기반한다. 문 정부는 주변 4강의 자국 이기주의 경향, 동아시아 정세의 불안정성, 북한의 핵무장 강화라는 위기를 ‘남북관계 개선’으로 돌파한다는 비전을 가졌다. 그 이면에는 ‘민족 우선’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 북한에 대한 낭만적 경험과 인식, 한국의 발전에 대한 자긍심 등이 작용했다. 하지만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한·미 관계는 신뢰의 위기에 빠졌고, 동맹은 상수에서 변수가 되어간다. 조 바이든 차기 정부는 동맹의 회복을 꾀하겠지만, 문 정부가 ‘대중(對中) 가치 동맹’이라는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면 ‘동맹의 위기’는 ‘동맹의 방기’로 나아갈 수도 있다.

◇늪에 빠진 한국 외교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친중적이라고 여기지만, 중국은 오히려 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친미에 기반해 있다고 믿는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나 대북 유엔 제재 정책 유지가 그 예다. 그러면 문 정부 시기 미국과의 관계는 원활했을까. 그렇지 않다. 한·미는 서로 다른 정책 정향, 외교의 빈곤성, 미국의 문 정부에 대한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신뢰의 위기에 빠져 있다. 그 사이 미·중 관계는 ‘전략적 협력’에서 ‘전략적 경쟁’ 관계로 전환하면서, 문 정부가 전력을 다했던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의 선순환 개선 노력이 모두 깊은 늪에 빠졌다. 현재 한국 외교는 붕괴하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천하질서와 깊어가는 미·중 전략 경쟁의 와중에 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봉착해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 중 97번째 과제가 ‘주변 4국과의 당당한 협력외교’였다. 한반도 역사의 당당한 주역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 국정 과제를 목표로 한·미 관계를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호혜적 책임동맹’ 관계로 지속 심화·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미는 신뢰의 위기에 봉착해 있고, 한·미 동맹은 점차 상수가 아닌 변수가 되어 가고 있다.

◇한·미 관계와 신뢰의 위기

정글과 같은 주권국가 체제의 국제관계에서 강대국이 아닌 국가가 당당하게 외교정책의 자율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비(非)강대국이 외교적 자율성을 강화하려 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추구한다고 하면 예외 없이 역풍을 맞게 된다. 준비가 안 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미·중이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양국의 외교·안보 정책은 상대를 견제하는 데 집중하고, 비강대국의 이해는 거의 고려 대상에서 배제되며, 선택의 압박만 강화된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빠르게 ‘자력갱생’이라는 대응 전략을 들고 나왔다. 핵무장과 비대칭 재래전력의 강화로 안보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자율성 강화를 통해 미·중 전략경쟁 시기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다. 이 정글의 세계에서 한국과의 관계는 수단이지 주 고려 대상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에 기초해 한·미 동맹을 경제적 이익의 증진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동맹의 신뢰를 흔드는 데 일조했다.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일방적으로 발표했고,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감축할 수 있다는 위협도 주저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미·중 전략 경쟁 시기에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을 더 강하게 확보하려 하며, 주한미군이든 한·미 동맹이든 대중 전략경쟁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계속되는 한 동맹의 갈등과 신뢰 위기는 불가피하다.

◇바이든, ‘對中 가치 동맹’ 요구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면서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로 동맹 회복을 추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한·미 동맹을 가치동맹, 특히 ‘대중 동맹’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강화할 것이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는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개연성이 높다. 또 중국을 겨냥한 다양한 다자동맹체제를 추진하면서 한국의 가입을 원할 것이다.

바이든은 미국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이미 버락 오바마 시절부터 선보였던, 미국의 경제에 이익이 되는 실용적인 외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과도하게 부담하는 국제적인 지출은 줄이고, 즉각적인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국제 개입 역시 가급적 자제하며, 국무부를 강화해 외교의 시대를 재추진하려 할 것으로 관측된다. 여기엔 ‘미국이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대신 한국은 미국의 이익에 순응하라’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국은 거부하기 어려운 선택의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 공고화 노력은 강화되고, 동아시아는 ‘중·러 vs 미·일’의 격전장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문제는 미국이 트럼피즘이 계속되는 국내정치 혼돈 속에서 바이든 정부의 외교정책만으로는 동아시아에서 과거의 위상과 영향력을 되찾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동맹의 방기’ 사태 오나

한국은 대륙과 해양 세력 사이의 ‘끼인’ 국가이고 국가 역량이 제한적인 ‘중간국’이며 안보 취약국이자 국제질서 변화에 민감한 통상국가다. 북핵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이대로 간다면 한·미 동맹은 위기를 넘어 ‘동맹의 방기’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올해 한국 외교는 자기 위상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새로운 포석을 필요로 한다. 한·미 동맹은 이제 북한 중심의 군사적 대북동맹에서 ‘포괄적인 전략동맹’으로 승화돼야 한다. 새로운 규범과 원칙에 입각한 천하질서를 수립하는 데 미국과 같이 전략적으로 숙의하고 동행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존중해야 한다.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중국을 포함한 지역 내 국가들이 공존할 수 있는 규범과 지역 협력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현 상황에서는 최대이익의 추구보다는 최대손실의 방지가 우선이라는 국정 원칙을 갖고 북한과의 ‘민족공존’ 이전에 한국의 ‘생존이익’을 우선 지켜내기 위한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미·중 전략 경쟁의 늪은 깊고 위험하다. 중산층을 위한 외교의 추진과 축성(築城)이 긴요한 시점이다. 세계의 나머지 주요 국가들과 역량을 모아 새 천하질서를 수립하는 노력에 적극 나서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정철학을 점검하고 외교 역량을 재건하며 차기 지도자들에게 현 상황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집단적인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아주대 정외과 교수·미중정책연구소장


■ 세줄 요약

늪에 빠진 한국 외교 : 문재인 정부는 ‘민족 우선주의’에 바탕을 둔 남북관계를 통해 외교적 난제를 극복하려 했음. 하지만 트럼프 시절 미·중 전략경쟁에 능동 대응하지 못하면서 한·미 관계는 신뢰의 위기에 봉착하고, 동맹은 상수가 아닌 변수가 됨.

바이든, ‘對中 가치 동맹’ 요구 : 조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의 회복을 꾀하겠지만 ‘가치동맹’ 즉 ‘對中 동맹’에 동참하라고 요구할 것으로 보임. 동아시아가 ‘중·러 vs 미·일’의 격전장이 되는 가운데 한국은 거부하기 어려운 선택의 압박에 직면함.

‘동맹의 방기’ 사태 오나 : 한·미 동맹은 단순한 위기를 넘어 ‘동맹의 방기’로 나아갈 수도 있음. 최대이익의 추구보다는 최대손실의 방지가 우선이라는 국정 원칙을 갖고 북한과의 ‘민족공존’에 앞서 한국의 ‘생존이익’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


■ 용어 설명

동맹 정치가 잘못 운영되면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가 나타날 수 있음. ‘방기’는 동맹을 버리는 행위이며 ‘연루’는 동맹 이익을 위해 원치 않는 갈등에 휘말리는 것.

‘전략(적) 경쟁’은 중국의 급속 부상과 미국의 대응을 표현한 말. 2017년 12월 발간한 미 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표현한 것이 시작인데, ‘패권 경쟁’과도 연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