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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3.02.10] 외교안보 정책 결정, 민주화가 시급하다

  • 김흥규
  • 2023-03-11
  • 130

윤석열 정부는 지난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정향을 보여준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주요 정책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정책 방향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처방안, 부동산 문제, 노동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부들과 일관성을 가지는 분야가 있다. 우적(友敵), 즉 ‘우리’와 ‘너희’를 확연하게 구분하면서 ‘너희’를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다. 아마 노무현 정부 이후 강화된 이 전통이 지속된다면, 정권이 바뀌면 그 ‘우리’도 확연히 배제될 것이다.

외교안보 분야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 다른 분야는 현 정부 내에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만, 외교안보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당장 국가의 존망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문재인 정부의 북한 중심 외교안보 전략에서 한·미 동맹 강화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확연한 정책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그 “일관성”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여, 잠재적 폐해가 감당할 수 없이 커질 가능성도 크다.

한국은 전통·지정학적으로 강대국 경쟁이 발생할 때마다 가장 위험한 파쇄지대에 놓인다. 세계 최강의 자리를 놓고 미·중이 격돌하고 그 결과에 따라 주변 많은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시대에 이미 들어섰다.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이 시점에서는 외교안보 정책 하나하나가 국가의 운명에 의미를 지닌다. 윤 대통령의 관련 언술들이나 잇따른 구설들, 현 외교안보 라인이 보여주는 과감한 선 있는 정책들은 깊은 불안감과 고민을 안겨준다. 한국은 현재 대외정책을 스스로 검열할 기제가 너무 취약하다.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검증되지 못한 공약과 정책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민주 정치제도의 특징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위험천만하다. 이는 오히려 시스템의 결함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는 그러하다.

이러한 우려의 이면에는 사회과학 분야, 특히 국제정치 분야가 지니는 속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분야는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적인 데이터 분석 방식과 사유는 본질적으로 과거 회고적이다.

미래의 새로운 변수와 행위자들 간의 상호 작용을 한 개인이나 특정 당파적 집단이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이 시대처럼 변화의 폭이 넓고 속도가 빠르고, 단절된 경험의 세계가 펼쳐지는, 즉 변수가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인간의 인지적 한계는 종종 회고적이 되고, 경로의존적인 제한된 이성이 주도할 개연성이 크다. 그만큼 이 분야는 겸허하고 유연한 사고와 열린 태도가 중요하다.

외교안보 분야는 그 인과관계를 특정짓기도 어렵기 때문에, 정책 결정자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린다. 그래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단호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대통령의 마음을 잡고, 정책이 된다.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반론도 어렵다. 물론 그 정책과 방향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이러한 상황에서 확신감 있게 정책을 추진한다면 이는 결국 “자기파괴적”인 결과로 귀결될 개연성이 커 보인다. 미국 역시 검증되지 않은 “블로브(the Blob)”라 칭해지는 소수 집단들이 단편적이고, 고립적이며, 자기 확신에 차서 형성해 낸 폐쇄적인 정책들이 오늘날 미국호가 직면한 좌초를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중국을 300여차례 오갔고 30년 이상을 중국에 대해 지켜봐 왔다. 나의 무지와 무능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중국을 잘 안다고 할 자신이 없다. 오히려 잘 안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가진 주장들을 경계한다. 그만큼 중국은 변수도 많고, 변화도 빠르고, 경험은 한정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 국제정치 상황은 그 기존의 패러다임과 판이 바뀌고 있고,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더 극화되고 있다. 일부 개인이나 집단이 정책을 일방적이고 자신있게 주도하는 것은 마치 동굴 속에서 사물 전체의 실제를 찾는 우를 범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경우, 역사는 니체가 설파한 철인왕의 현신을 기대하기보다는 제도를 강화하라고 제안한다. 미국식의 민주주의도 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비효율성을 감수한 합당함과 견제의 힘을 중시하는 이유이다.

안타까운 상황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검증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들을 고민할 제도나 집단들이 너무 취약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외교안보 정책의 생태계는 전문가 집단마저 당파적인 정쟁으로 상호 ‘배제’를 당연시하고, ‘국가’는 실제 실종되었다. 극단화된 당파성과 대외관을 지닌 집단이 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이 살길을 찾을 가능성이 커진다. 보다 경청하고, 관용적이며, 공모적인 정책 결정 체제로 전환하는, 즉 “외교정책 결정의 민주화”가 시급하다.

미디어의 역할 역시 기대난망이다. 한국의 현 정책들이 미·중 전략경쟁과 관련해 오판을 한다면 이를 감당할 국가역량은 존재하는가?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지는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관련해 어떠한 정책 좌표를 찍어야 하는가? 대중국 정책은 현상유지와 적대적 충돌 사이에서 어떠한 정책의 결합이 합당한가? 양안 충돌 시 한국의 참전은 당연한가? 이들에 대한 현 정부의 정책적 상상력은 합당한가? 현 외교안보 담당자들이 이러한 정책을 수행할 적임자들인가? 이렇게 한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정책들은 기대치만큼 위험도 항상 수반한다. 그 고통은 국민들의 몫이다. 지나치게 직선적(straightforward)이고, 단선적(simple)이며, 자기 확신적(stubborn)이고, 빠른 정책 집행과 결론에 도달(speedy)하면 감당 못할 비용(stupid)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현 시대는 이 5S를 피해야 한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는 그만큼 위험도와 고통의 강도가 커진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이 비용 분담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보다 개방적이고, 탈집권화되고, 대한민국의 역량을 모을 수 있는 새로운 ‘민주적’ 정책 결정 체계를 수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