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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조선일보 2014.07.07] [시론] 한국 외교에 難題(난제) 던진 시진핑 주석 방한

  • 김흥규
  • 2015-08-25
  • 1387

의 일본 비판에 정부 호응하며 외교적 절제와 명민의 여백 깨져

·중 경쟁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어느 한 나라에 기울어지기보다

중견 국가로서 架橋 역할에 충실해 모두가 우리를 필요로 하도록 해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여운은 쉽사리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그가 방문하기 전부터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미·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강했다.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공동성명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고, 한국이 껄끄러워하는 주요 외교·안보 사안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 주석은 서울대 방문에서 예상을 깨고 일본에 대한 강한 비판과 더불어 한·중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청와대 측은 급기야 비공개 일본 관련 토의 내용을 공개하였고, 시 주석의 강연 내용에 호응하였다.

 

그 내용이야 충분히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지만, 공동성명에서 보여준 외교적 절제와 명민(明敏)의 여백은 깨지고 말았다. 일본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또 일본의 대미 가치를 고양하기 위해 평소 의도적으로 설파해 온 '한국의 중국 편향론'이 옳았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미국은 중국 견제가 절실한 상황에서 한국의 이탈을 더욱 우려할 것이다.

현재 상황대로라면 중국은 시 주석의 임기 중인 2020년을 전후하여 GDP 규모로는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국이 될 전망이다. 그간 많은 전문가는 중국 국내 문제가 산적해 있고 정책 연속성이 강한 정치·문화적 여건을 들어 2020년대가 넘어야 미·중 간의 경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시진핑 시기 중국의 행보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다. 시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권력을 집중하면서 대외 정책 역시 기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적인 신중한 태도를 넘어 '새로운 아시아 안보'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 설립' '새 실크로드 건설' 구상 등을 제시하였다. 이 구상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해나가면서 중국이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 국제사회는 이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번 한·중 정상회담을 주목하였다. 중국은 이번 방한을 한·중 연대를 충분히 과시하는 무대로 활용하였고, 한국은 이 어려운 문제에 명민한 답을 써내지 못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오늘을 분명 '세력 전이(轉移)의 시기'로 기록할 것 같다. 근래 1000년 역사에서 우리는 송·, ·, 임진왜란, ·, 한말, 한국전쟁 등 수많은 세력 전이 시기를 겪어왔다. 그때마다 한반도는 전쟁으로 초토화되거나, 정권이 교체되거나, 나라가 망했던 아픈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단 한 번도 이러한 시기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간 경험이 없다. 이미 세계 15위권 경제력을 가질 정도로 전례 없이 성공한 대한민국은 이제 국제 관계에서도 전례 없는 성공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싶어 한다. 평화적 한반도 통일의 꿈도 이루고 싶다.

우리에게는 네 가지 대처 방식이 있다. 첫째는 모든 강대국의 이해를 만족시키는 길이다. 둘째는 모든 강대국이 조금씩 불만스럽고 미흡하게 여기되 그들이 우리를 여전히 필요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강한 강대국에 편승하는 것이다. 넷째는 전략적 사유 없이 강대국의 요구에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첫째 길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셋째 길은 시대정신에 부합하지도 않고 단기적으로는 유용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그 대가가 더 클 수 있다. 마지막 길은 최악의 선택이다.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둘째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변화하는 국제정치 상황을 명민하게 이해하고 관찰하면서 중장기적인 안목과 실재 사안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하면서 현실적 대안을 찾아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쉽고 명쾌한 답은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개연성이 크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세계적 리더십을 형성하였고, 중국 역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다원주의와 민주의 개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중은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공동 질서를 세우느라 혼돈하기만 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우리는 섣부른 판단을 억제하고 인내심을 갖고 이 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견 국가로서 지역의 평화와 안정·발전·번영을 위한 우리만의 '가교(架橋)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역사가 무수히 증명한 것처럼 명민하지 못한 리더십이 집단을 얼마나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민주 체제의 특성을 잘 활용하여 최대한 지혜를 모아 다양한 대안을 지니고, 유연하게 이를 활용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