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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7.03.08] 중·베트남 어떻게 미와 수교했나

  • 김흥규
  •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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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한후 美와 협상

크리스토퍼 힐(Hill) 미 국무부 차관보는 7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회담을 끝낸 뒤 양국 수교문제를 언급, “매우 유익하고 긴 논의를 했다. 외교관계 회복의 정치적이고 법적인 측면도 논의했다”고 했다. 양국 수교 협상이 개시된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전례를 따르게 될까. 전문가들은 미·중, 미·베트남 수교 과정이 모델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과 베트남 모두 미국과 전쟁을 치렀고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미·중 수교는 ‘핑퐁 외교’로 불리는 미 탁구 대표단의 방중으로 시작해서 1971년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등을 거쳐 이듬해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 간 ‘미·중 공동선언’으로 큰 획을 긋는다. 정식 외교관계 전에 연락사무소를 상대국에 설치했는데, 이후 정식 수교까지 6년이 걸렸다. 협상 시작 후 8년이 걸린 셈이다. 미·중 관계 전문가인 김흥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미·중 모두 당시 소련 견제라는 전략적 공감대가 있었다”며 “다만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수출 문제를 풀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고 했다.
 

미·중 수교 모델은 현재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국내 정치 상황과 유사하다는 분석도 있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실패에서 벗어날 돌파구가 필요했고, 지금 부시 대통령도 이라크전의 실패를 만회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미·베트남 수교 때는 베트남이 적극적이었다. 지지부진하던 수교 협상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 때인 1994년 본격화돼 1년여 만인 95년 12월 매듭됐다. 배긍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당시 유일한 걸림돌은 베트남전 당시 실종된 미군들의 유해 회수 문제였다”며 “당시 베트남은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감동할 정도로 완벽하게 미측에 협조하면서 문제를 풀어갔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중국과 베트남 지도부는 개혁·개방 정책을 기본 노선으로 채택한 뒤 미국과 수교 협상을 벌였고, 핵 문제도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 미·북 관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