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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칼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NEW [칼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 이지윤
  • 2013-07-25
  • 28484

집안 곳곳을 습하고 끈적끈적 하게 만들던 장마가 계속되더니 폭염과 열대야가 모든 집집을 숨막히게 할 기세다. 자칫하면 지치고 짜증나기 쉬운 때이다. 그런데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연일 열 받게 만드는 국정원 선거개입 관련 뉴스가 보도되고 있어 폭염과 열대야를 잊게 해 줄 것 같다.

국정원은 국민의 안녕과 안위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 존립의 근거이다. 더구나 국정원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민의 기관이다. 이런 국정원이 국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과정에서 어느 정파의 이익을 위해 정치공작에 조직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 이것은 범법 행위이다. 검찰이 국정원의 범법 사실을 수사결과에서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는커녕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일방적으로 공개하여 나라를 들끓게 했다.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다.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는 진정한 길이 어느 정파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남재준 국정원장을 임명한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 박대통령은 '국정원 대선개입이 나하고 아무 관련이 없다, 나는 덕본 것도 없다'고 말하고 국정원의 셀프개혁만을 주문했다. 이것은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범법 행위라는 것,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진정한 개혁에 미흡하다는 것을 아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국정의 책임자로서 할 말이 아니다.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무책임한 언행이 더위에 시달리는 우리를 더 지치게 하는 요즘 오아시스의 샘물처럼 우리 영혼을 맑게 해주는 영화가 있다.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가 실수로 가져온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선 이란 소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Where Is the Friend's Home?)(1987)가 그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 <버찌의 맛>(Taste of Cherry), <바람이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The Wind Will Carry Us) 등으로 로카르노, 칸, 베니스 영화제 등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은 이란의 뉴웨이브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이다. 종종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담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이란에서 10년 이상 동안 상영금지 당했고, 2001년 9·11 사태 이후 한동안 미국 입국이 불허되는 등 그는 국내외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그의 영화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초기 작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는 8살 난 초등학교 어린이 아마드의 아름다운 영혼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교실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카메라가 닫혀 있는 교실문을 교실 바깥에서 클로즈업으로 보여줌으로써 시작한다. 화면에 선생임의 손이 나타나 문을 열면 카메라는 선생님의 등장으로 갑자기 조용해진 아이들의 긴장된 얼굴을 보여준다. 굳은 표정의 선생님은 아이들이 떠든 것을 야단치고 '조용히 해,' '물어볼 때만 대답해'라고 엄숙히 말하며 아이들의 숙제를 검사한다.

아마드의 짝인 네마자떼는 숙제를 같은 공책에 해오지 않아 선생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는다. 숙제 공책을 사촌 헤마티의 집에 놓고 와 다른 공책에 숙제를 해 온 것이다. 선생님은 모든 일에는 원칙이 있으며 같은 공책에 숙제를 해오는 원칙을 한 번 더 어기면 네마자떼를 퇴학시키겠다고 경고한다. 야단을 맞고 우는 네마자떼를 아마드는 걱정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아마드와 네마자떼는 같이 뛰어간다. 네마자떼가 돌에 걸려 넘어지자 아마드는 그가 떨어뜨린 공책을 들어주고 수돗가에 가서 그의 옷에 묻은 흙을 닦아주고 무릎의 살이 다쳤는지 살펴본다. 자본주의 경쟁 교육에 물들어 자기 밖에 모르는 요즘의 한국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아마드에게는 인간 본연의 따듯한 측은지심이 살아있다.

집에 돌아와 동생에게 젖병을 물려주는 등 집안일을 돕고 숙제를 하려던 아마드의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찬다. 네마자떼의 공책을 모르고 가져온 것이다. 네마자떼가 한 번 더 공책에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고 엄중히 경고한 선생님의 말을 잘 알고 있는 아마드는 걱정에 휩싸이게 된다. 자기 때문에 퇴학당할 처지에 놓인 네마자떼에게 공책을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을까? 

아마드는 엄마에게 사정을 말하고 먼 마을 포쉬테에 사는 네마자떼에게 공책을 돌려주러 가야한다고 말한다. 집안 일 하느라 지친 엄마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놀지 말고 숙제하라"는 말만을 되풀이 한다. 아마드가 공책을 돌려줘야 한다고 다시 말하자, 엄마는 공책은 내일 갖다 주고 오늘은 당장 숙제나 하고 얼른 빵을 사오지 않으면 때려주겠다고 소리친다. 

엄마가 집안에 들어간 동안 아마드는 결단을 내린다. 엄마에게 매맞을 것을 각오하고 네마자떼에게 공책을 갖다주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을 자기 편의를 위해 버리지 않고 어려움을 무릎 쓰고 결연히 행동으로 실천하는 어린 아마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마드는 네마자떼가 사는 포쉬테로 달려간다. 포쉬테는 아마드가 사는 코케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이라 그는 산길을 넘고 넘어 쉬지 않고 뛰어간다. 빨리 네마자떼에게 공책을 돌려주고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아마드는 쉬지 않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 길을 뛰어간다.

아마드가 드디어 포쉬테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가 네마자떼에 대해 아는 것은 그가 포쉬테에 산다는 것뿐이다. 그는 포쉬테가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진 넓은 지역임을 알게 된다. 만나는 어른들에게 길을 묻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미 지쳐있거나 자기 일에만 마음이 있어 어린 아마드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아마드는 어렵게 네마자떼의 사촌이자 급우인 헤마티가 근처에 산다는 것을 알고 찾아간다. 하지만 헤마티는 5분 전에 자기 아버지와 코케로 갔다. 헤마티를 찾아 아마드는 자기 마을인 코케로 다시 뛰어간다.

코케로 돌아간 아마드는 네마자떼의 아버지로 생각되는 아저씨를 알게 되고 그가 포쉬테로 나귀를 타고 가자 그를 쫒아 다시 포쉬케로 뛰어간다. 드디어 뒤따라간 아저씨의 아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네마자떼란 이름을 가진 다른 소년이다. 네마자떼란 이름은 그곳에서 흔한 이름임을 알고 아마드는 낙담한다. 날이 저물고 밤이 되도록 아마드는 네마자떼를 찾아  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코케의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의 실수로 네마자떼의 공책을 가져왔기에 공책을 돌려 주기위해 종일토록 뛰어 다녔지만 모두가 허사가 되어 집에 돌아온 아마드! 그는 네마자떼가 퇴학당할 것이 걱정이 되어 저녁밥도 먹지 못한다.  하루 종일 뛰어 다녀 무척 허기졌을 아마드는 엄마가 밥을 먹으라 재촉해도 네마자떼에 대한 책임감에 밥 먹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방바닥에 꾸부리고 앉아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심하게 불어대는 문 밖의 바람과 함께 밤새 숙제를 한다.

다음날 선생님은 학생들의 숙제를 검사하기 시작한다. 아마드는 교실에 보이지 않는다. 네마자떼가 걱정어린 얼굴로 앉아있다. 한 사람 한사람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이 네마자떼 가까이 왔을 때 교실문이 열리고 아마드가 나타난다. 자리로 온 아마드는 두 개의 공책을 꺼낸다. 하나는 자기 공책이고 다른 하나는 네마자떼의 공책이다.

선생님은 다가와 네마자떼의 공책을 검사한다. 선생님은 자세히 숙제를 보고 "잘했다"고 표시한다. 공책의 옆쪽에는 아마드가 어제 포쉬테에서 어느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꽃이 끼여 있다. 아마드의 아름다운 영혼을 나타내는 꽃이리라!

아마드는 네마자떼가 넘어졌을 때 그를 돕다가 그의 공책을 자기 것으로 알고 실수로 가져왔다. 이로 인해 네마자떼는 숙제를 공책에 못해 퇴학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마드는 선의였지만 자기가 타자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한 것에 대하여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그리고 책임을 지기 위한 행동을 몸과 마음을 다해 성심껏 행한다.

아마드는 8살 어린이이지만 무책임만이 판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사는 지친 이들에게 '이 지상에 여전히 아름다운 영혼은 존재한다'라는 것을 확인케 해주는 희망의 복음이다. 우리 시민들의 가슴에도 아마드처럼 아름다운 영혼이 잠자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다시 조금이라도 깨우자. 그러면 무책임한 인사들에 대한 비판여론은 엄중해 질 것이요, 머지않아 국정원은 제자리를 잡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정경훈 아주대학교 교수

[오마이뉴스 2013.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