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학교

검색 열기
통합검색
모바일 메뉴 열기
 
 
 

아주인칼럼

하이에크의 지적 용기

NEW 하이에크의 지적 용기

  • 박성숙
  • 2008-07-16
  • 44603

1968 년 노벨이 유언에서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노벨상을 추가되었다. 바로 스웨덴 중앙은행이 은행설립 300주년 기념사업으로 신설한 노벨경제학상이다. 노벨경제학상은 상의 명칭이나 상금을 제공하는 주체가 다르다. 다른 상들은 모두 Nobel Prize로 시작된다. 반면  노벨경제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리는 스웨덴 은행의 경제학상"(The Bank of Sweden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이라고 긴 명칭을 가진다. 다른 노벨상은 상금이 노벨 재단으로부터 나오지만 경제학상만은 스웨덴 은행이 직접 부담한다. 노벨 가(家) 사람들 중 일부는 노벨경제학상이라는 명칭을 빼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노벨의 유언과는 직접적 관련도 적으며 노벨이 생존시에도 경제나 경영을 싫어했고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과학자, 발명가로 인식되길 희망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노 벨경제학상은 출신 배경만 빼고는 다른 노벨상과 동일하다. 기여한 바의 독창성, 과학과 실용상의 중요성과 영향도가 주요 선발 기준이다. 특히 2005년 노벨경제학상 선정위원장이었던 아사 린드벡(Assar Lindbeck)도 지적했듯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뉴턴의 명언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후학들이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도록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 어깨를 새로이 만들어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경제학이 사회과학인 만큼 경제학자가 공공정책을 포함한 사회 전체에 미친 영향도 어느 정도 고려한다.


 경제학을 넘어서는 하이에크의 영향력

  역 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중 정치나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꼽는다면 하이에크(Hayek, Friedrich August von, 1899~1992)를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정치 지도자들이 그의 신념을 따르고 있다. 처칠, 대처, 레이건, 부시가 가장 대표적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이 1970년대 후반 전당대회에서 당 노선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대처는 자신의 가방에서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꺼내어 모두 볼 수 있도록 높이 들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바이다”라고 테이블을 힘차게 쳤다고 한다. 하이에크의 영향력은 경제학자와 정치가를 넘어선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나 피터 드러커는 하이에크를 이 세기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로 부르고 있다. 무엇이 하이에크를 이런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했을까?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1974년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 이유를 “화폐와 경기변동 이론에 대한 선도적 연구와 경제, 사회, 제도적 현상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분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노벨상 수상강연에서 밝혔듯이 하이에크가 제안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이 열렬히 추종했던 명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은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이 성장을 일구어내는데 필요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데 만족해야한다. 장인이 물건을 만들듯이 결과를 직접 다듬을 수 없다.” 즉, 제한된 지식을 가진 인간들로 모여진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知的 勇氣

  이상의 하이에크의 명제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단순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이러한 명제를 제안하고 이를 발전시켜나간 시기의 인류의 상황을 보면 하이에크의 지적 용기와 인내를 읽어낼 수 있다.

  1944 년 ‘노예의 길’이 출판된 후 하이에크는 그의 도발적 주장으로 말미암아 국제적 인물로 부상한다. 그러나 하이에크 그 자신은 거의 학문적 사망선고를 받는 상황으로 몰리고 만다. 하이에크 스스로 “나의 주장이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전문가로서의 신망을 완전히 잃을 정도였다”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이 책을 하이에크가 살고 있던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세워지고 있던 복지국가에 대한 위험스럽고 구시대적인 공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20~30년간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50~60년대 동안 구 소련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정부의 덩치를 키워가던 유럽 각국들 역시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에릭 홉스바움은 하이에크를 ‘광야의 예언자’라고 무시하였고 영국 철학자인 안토니 퀸톤은 그를 ‘위대한 공룡’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의 추종자였던 처칠은 이를 일찌감치 예견한 듯 했다. 1945년 하이에크의 책을 직접 거명하며 선거를 치르고 있던 윈스턴 처칠도 하이에크와 만난 자리에서 단 한마디만을 남겼다. “당신의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러나 영국에서 결코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하 이에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어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저작 역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경제학자로서의 신망도 잃게 만들었다. 어느 대학도 그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영국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미국의 몇몇 대학을 전전하다 마침내 1950년 시카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쉽게도 그에게 자리를 준 곳은 경제학과가 아니었다. 밀턴 프리드만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로서는 하이에크가 실제로 어떤 경제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벨상에는 능력과 용기가 필요

  어 려움이 극해 달하고 있을 때 노벨상이 의외로 찾아왔다. 당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는  정부개입주의자이자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주창자인 군나르 미르달에게 상을 수여하려 했지만 편향된 선택임을 불식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로서 하이에크를 공동 수상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하이에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볼 때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경제학계나 정치 사회 환경은 7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바뀌어 갔다. 1974년 오일쇼크 이후 유럽 각국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무비판적 정부 개입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낳았다. 경제학자들은 정부개입의 한계와 시장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였다. 레이건과 대처와 같은 자유세계의 정치지도자, 그리고 동부유럽, 구소련 그리고 중국 등의 반체제 인사들 역시 하이에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에크가 일찍부터 예견했던 소련의 붕괴가 이어졌다. 밀턴 프리드먼은 “내 생각으로 이 사이클에서 아담 스미스의 역할을 한 것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다”라고 하이에크와 서구 사회가 걸어갔던 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하 이에크의 생애는 사회과학자와 노벨상 수상자가 걸어가는 길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은 찬사보다는 적지 않은 시련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하이에크의 지적대로 새로운 것이 유용함을 입증할 임무는 그것을 주창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기존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가꾸고 지켜갈 수 있는 지적 용기가 요구된다. 이념적 편향과 상관없이 하이에크는 두 가지 모두를 갖춘 노벨상 수상자였다고 하겠다.

 

인간존중 5호 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중에서

이전글

화학분야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 노벨화학상

다음글

시급한 블루골드 확보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