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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천도(遷都)의 역사

NEW 천도(遷都)의 역사

  • 박성숙
  • 2008-07-16
  • 47460
역사에서 보면 도시라든가 국가는 인류의 이동생활이 끝나고 정착단계에 들어가면서 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목민에게 있어 국가니 도읍이니 하는 것들은 농경민의 경우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천도(遷都)라는 것도 어쩌면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사 상 최초의 천도는 단군이 세운 고조선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조에는 여러 개의 지명이 보이는데 우선 환웅(桓雄)이 세상에 내려와 처음 자리잡은 백악산(白岳山)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가 있고, 그 후 단군이 태어나 고조선을 세우고 처음 도읍한 곳은 평양성이라고 하였다. 이어 단군은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기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천도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 환도성 등 압록강 유역에 도읍을 두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멸망하기까지 도읍이었던 곳은 586년(평원왕 28)에 천도한 장안성(長安城)이었다. 백제도 위례성, 한성 등 한강 유역을 도읍으로 하다가 475년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538년(성왕 16)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시대에는 물론 통일시기를 거쳐 고려에게 왕조를 내어줄 때까지 줄곧 경주 한 곳만을 도읍으로 삼았다. 천도를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본기에는 통일 직후인 689년(신문왕 9) 왕이 달구벌(達句伐)로 천도하려다 그만두었다는 간단한 기록이 별다른 설명 없이 전하고 있다.
  
  통일 후 신라는 왕이 거처하고 있는 수도가 국토의 동남부에 편재(偏在)해 있는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5소경(小京)제도를 두어 운영하였다. 동, 서, 남, 북, 중원경을 두어 지역적 한계로 인한 통치력의 공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발전은 경주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00여 년 뒤 지방 호족세력의 발호와 권력을 둘러싼 귀족 내부의 파쟁이 일기 시작하더니 10세기에 들어 급기야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하지만 경주 한 곳에 도읍했던 것이 신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처럼 신라를 제외한 고대사회에서의 천도는 대부분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경위를 확인할 길이 없는 고조선시대의 천도는 차치하고라도 고구려나 백제사에 있어서의 천도는 거의 모두가 전쟁이나 외침 등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이후 고려는 몽고 침입 때 잠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귀환한 일이 있었고, 조선의 경우는 한 번도 천도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특이하게도 수도인 개경과 함께 서경, 남경 등 3경(京) 제도로 국정을 운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 이상 서경으로의 천도를 위한 끈질긴 시도가 있었고, 말기에는 한때 한양으로의 천도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신왕조 개창 후 긴 논란 끝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천도 논의가 있었고, 후기에 와 정조는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최근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놓고 한동안 소란하던 끝에 어느 날 갑자기 '천도'라는 용어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이 말을 꺼낸 이들도 천도면 안 되고, 이전(移轉)이면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천도'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엉뚱한 소동은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개인집의 이사도 어려운 법인데 국가의 막중지대사이다 보니 시끄러울 수밖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보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인가를 가늠해보는 일일 것이다. (경인일보/04.07.02/세평)